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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주리 Apr 15. 2023

<스즈메의 문단속>, 진화하는 변태 신카이 마코토.

개인적인 감상평 10

<스즈메의 문단속>

별점 : 4개

일자 : 2023.03.18

장소 : 롯데시네마 센트럴락

감상 :


* <스즈메의 문단속>, '신카이 마코토' 감독 영화에 대한 크고 작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음


신카이 마코토 감독에 대한 내 감상은 늘 '변태 같아...'였다.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만 본 입장에선 그랬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변태 같았다... 이점에서는 그만의 어떤 '감성 코드'가 나랑은 잘 안 맞았다고 해야 하겠다.


남들이 좋다, 재밌다고 얘기하는 영화나 드라마에 대해 나는 은근한 거부감이 생긴다. 정확히는 '00 재밌는데 아직도 안 봤어? 왜 안 봐? 그거 꼭 봐야 돼'라는 말을 들었을 때 거부감이 생기는 것 같다. 그렇다고 홍대병은 아니다... 한창 유행했던 <오징어게임>, <수리남>, <카지노> 다 봤지만 이 경우엔 그냥 내가 관심이 가서 먼저 본 거였지, 누군가에게 강요당하듯이 본 건 아니었다. 그래서 주변에서 계속 보라고 알게 모르게 추궁당하는 <더 글로리>... 안 봤다.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는 그런 느낌이었다. 주변의 호들갑이 피곤했다는 인상이 남았다. 좋다는 사람은 좋다는 사람대로, 싫다는 사람은 싫다는 사람대로 극명하게 나뉜 여론 때문에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은근한 거부감에 휩싸여 있었다.


앞서 말한 두 영화의 감상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도 없다. 좋다는 얘기도 나쁘다는 얘기도 딱히 할만한 게 없다.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진 않았다. (ㅋㅋㅋ) 그래서 이번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게 됐을 때, 정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한 편으로는 최대한 빠르게 영화를 먼저 감상해서 수많은 호들갑에서 조금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좋다는 의견이든, 싫다는 의견이든 일단 내가 영화를 알고 있으면 어쨌든 공감할 수 있으니까.


작화, OST가 좋다는 건 많이들 하는 말이니까 제쳐 두고 이야기하겠다. 신카이 마코토에 대한 수많은 루머들에 대해서도... 다루지 않겠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영화를 본 지 한 달이나 지나서 쓰는 영화 감상평이라니, 이거 제대로 기억이나 하고 쓰는 거 맞나 싶긴 하다. 하지만 오히려 더 임팩트 장면만 남아 있는... 그런 느낌이지 않을까?





자기가 싼 똥.. 아니 이게 아니고 '결자해지'


<스즈메의 문단속>의 이야기 구조는 저지른 일을 수습하는 과정이다. 예전에 친구와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을 봤을 때, 친구가 이런 느낌의 말을 한 게 기억이 남는다.


"결국 스파이더맨이 자기가 싼 똥 치우는 게 다네."

"뭐... 성장을 했으니까 뭐가 남지 않았을까."


스파이더맨에 대해 얘기할 건 아니지만, '결자해지 구조'의 영화는 겉으로는 그냥 원점으로 돌아왔을 뿐인 상태일지 모른다. 그러나 결말 부분의 피터 파커는 결코 영화 시작 전의 피터 파커가 아니다. (가족도 애인도 친구도 다 잃...) 모든 이야기가 그렇다. A라는 인물은 B라는 사건을 겪은 뒤에는 A가 될 수 없다.


당시에 나는 '성장을 했으니 뭐든 남았다'는 느낌으로 얘기했던 것 같다. 두루뭉술하지만 어쨌든 핵심이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인물은 사건을 통해 성장한다. 피터 파커가 자기가 싼 똥을 치웠을 뿐인데, 은근슬쩍 자립하게 되는 과정은 그렇게 부자연스러운 전개가 아니다. 해당 과정에서 잃거나 얻은 것이 무엇인가? 똥을 치우는 과정에서 걸레를 잃고... 비유가 저급하지만... 아무튼 무언가를 잃고 얻고 하면서 인물은 반드시 변화한다.


결국 스즈메가 땅에 박혀있던 고양이(요석)를 뽑으면서 생긴 일련의 사건들은, '다시 고양이를 돌려놨을 뿐'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스즈메 MK-2'로 성장하게 되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 그게 이야기니까.



흔한 일본 여고생이 가진 초능력


'신카이 마코토'가 그리는 일본 여고생 주인공은 비범하거나, 특별하거나, 신비로운 능력의 소유자다. 일본 감성으로 생각하자면 '무녀'다. '재난 3부작'이라고 불리는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스즈메의 문단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여고생이고, 무녀다.


후에 서술하려 했지만 스즈메는 슈퍼 혈청을 맞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먼 거리를 자전거로 순식간에 주파하는 능력, 맞지도 않는 신발을 신고도 행군이 가능한 체력, 하루종일 뛰어도 별로 헐떡이는 기색도 없다. 버려진 고물 자전거로 여고생(+고양이 2마리)을 뒤에 태우고 달리면서, 그저 땀을 조금 흘릴 뿐인 이모까지... 굉장히 남다른 유전자의 집안이다...


각설하고, 신카이 마코토가 어째서 '이미지적으로 연약한' 일본 여고생에게 무녀의 포지션을 주고, 사건을 극복케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는 있겠다. 그리고 이 부분이 내가 <스즈메의 문단속>을 좋게 볼 수 있었던 이유다.


감독의 앞선 두 영화는 로맨스적인 요소가 매우 짙기 때문도 있겠지만, 남주인공이 신비로운 무녀의 행적을 따라갈 뿐이라는 감상이었다. 재난이라는 거대한 배경은 그저 배경으로 소모되었고, '그래서 둘이 어떻게 됐어?'라는, 사람의 관계에 더 집중한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너의 이름은>부터 '재난 3부작'이라고 얘기는 하지만, 재난을 진정으로 바라보고 다룰 수 있게 된 건 <스즈메의 문단속>이 처음이다.


일본은 자타공인 재난의 샌드백이다. 심심하면 지진이 나고, 해일이 덮치는 불안한 섬. 나는 일본 사람들이 수많은 신을 믿는 이유가 그런 환경에서 기인한 문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신은 변덕쟁이니까.'라는 대사는 괜히 등장한 게 아니다. 일본에게 신은 그런 존재다. 가혹하고, 이해할 수 없고, 설득시키고 싶고, 나아가서는 통제하고 싶은 존재.


일본의 재난은 과거의 사람들에게는 신이 아니고서야 설명할 수 없는 고통과 불안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근간이 되는 일본의 신화가 있다.

일본의 신화에 등장하는 메기 신.

옛 일본 사람들은 수많은 지진의 원인을 종교적으로 해석하려 했다. 과학적인 근거를 찾기 힘들다면 그럴 수밖에. 그들은 지진이 어떤 동물에게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처음에는 일본 열도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용의 형상이었다가, 우주 물고기, 그리고 점차 메기의 형태로 변형되었다고 한다. 진흙탕에서 메기가 사납게 꿈틀대듯이, 열도 바닥의 거대한 메기가 꿈틀댈 때마다 땅이 흔들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메기를 다른 신이 쐐기 돌로 누르고 있는데, 이 신이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되는 일이 생기면 메기가 꿈틀대고 지진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메기들은 실제로 작은 진동을 감지할 수 있다고 한다. 메기 신은 큰 지진들을 겪으며 점차 숭배되기 시작하며, 위에 보여준 그림(우키요에)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메기가 두려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지진을 일으킨 것을 사죄하며 건물 재건을 돕는 모습이라든지, 부자들의 돈을 털어 나눠주는 모습이라든지 좀 더 인간들에게 친숙한 모습으로도 묘사되는 등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작중 실제로 지진을 일으키는 존재인 미미즈는 어떤 동물로 형상화되지는 않았다. 다만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형태로 꿈틀대는 괴물체의 모습이다. 동물애호가인 내 입장에서는 '어떤 동물이 문제였다!'라는 인상을 심어주지 않은 점이 꽤나 만족스러웠다고 볼 수 있겠다.


그도 그럴 듯이 문에서 거대한 메기가 꿈틀대며 울부짖었다면 영화관 곳곳에서 겁에 질린 아이들의 울음이 터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대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형체의 무언가라면 그저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것 같다. 미미즈가 등장할 때마다 나오는, 뭔가 성스러우며 괴기스러운 분위기 연출은 덤이고.


한 편, 영험한 고양이 신(심지어 실전 폼이 따로 있는)은 좀 클리셰지만, 다짜고짜 귀엽다. 좀... 열받게 만드는 것도 고양이답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양이의 머리통이... 신의 머리통이라는 것일까.


아무튼 그런 거대한 존재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여고생에게 주는 건, 정말 변태 같은 생각이 아닐 수 없겠다. 나름 해석하자면 상징적으로는 큰 의미가 있겠지만...


스즈메가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여성 서사의 주인공으로서 훌륭하게 역할을 해냈다는 점도 돋보인다. 여기서는 소타를 의자로 만들어버린 게 주효했다고 생각한다. 남자 성년인 소타가 여자 미성년 스즈메와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도록 하는 고육지책이었겠지만 꽤나 효과적이었다는 감상이다. 만일 소타가 의자로 변하지 않았다면 스즈메는 '결자해지'를 빙자하여 '실제로 일을 처리하는' 소타를 억지로 따라다닐 뿐인 조수 역할에 불과했을 것이다.


걸어 다니는 의자(그것도 한쪽 다리가 없는)는 꽤 재밌고 귀여운 소재였다. 의자는 일단 소타이면서 동시에 엄마를 추억하는 유품이고, 스즈메의 결핍이면서,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매개체이다. 그야말로 영화 내 모든 의미의 교집합에 서 있다. 소타는 '의자, 어른'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속성을 굉장히 잘 드러낸 인물... 이 아니라 사물...로 등장한다. 의자로서 지나치게 도구적이지 않으면서 사람으로서 독단적이지 않고, 어리지만 나름 똑똑한 어른으로서 미래에 대한 책임감과 동시에 불안감에 휩싸여있다.


다리가 세 개뿐인 의자.


따라서 이거 완전 해리포터잖아, 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스즈메'와의 만남은 조금은 뻔하지만 일리가 있는 전개로, 스즈메의 심적 성장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이었겠다.


실제 사건이 이야기에 실어주는 힘


<스즈메의 문단속>이 앞선 두 영화와 다른 결정적인 차이는, 구체적인 사건을 연상시키는 소재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지진을 실감해 본 적도 없는 내게는 비교적 아득한 이야기이지만, 참사를 소재로 이야기를 썼다는 점에 대해서는... 경외감이 들기도 한다.


실제의 참사를 이야기화 하는 건 상당한 용기와 지혜가 필요한 작업이다. 비극에 대해 자세히 알면 알수록 더 그렇다. 따라서 많은 이야기꾼들은, 참사에 대해 간접적으로 비유와 상징을 통해 연상하게끔 하기도 한다. 자세히 알고 쓰면 너무 끔찍하고, 뭣도 모르면서 쓰면 너무 무례해서, 어렵고 난처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이야기들을 만드는 건 어쩌면 남은 자들에게 주어진 과업이다. 남은 자들이 할 수 있는 건 떠올리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폐허가 된 자리에서 떠난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 위로와 희망이다. 스즈메와 소타가 폐허의 문을 닫으며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처럼.


영화 내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 중에 하나를 꼽는다면 '잘 다녀오라'는 말일 것이다. 흔한 인사말이지만 그 의미는 단어 자체로 '살아서 돌아오라'는 말이다. 영화에서 끝없이 다녀오겠다고 말하는 건 그냥 그게 상황에 맞는 적당한 인사말이어서가 아니라,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ㅡ떠난 사람들에 대한 인사와 남은 사람들의 역할ㅡ에 대한 끊임없는 환기다. 다녀오겠다고, 또 잘 다녀오라고,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는 사람들의 약속인 거다.


신카이 마코토의 진화


신카이 마코토가 분명 이전 같지는 않다고 얘기할 수 있겠다. 누군가는 개성이 줄어들었다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본인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사람이 '대중 영화의 감독'으로서 진화했다고 느꼈다.


아쉬움도 분명 남아 있다. 모든 만남이 그저 우연에 기댄 스타트라는 점이나, 그 인물들이 지나치게 친절하다는 점. (물론 불친절한 인물이 등장하면 스즈메의 문단속은 극한의 하드코어 모드가 되었겠지만) 인물들이 양면적일 뿐, 복합적이거나 입체적이지는 못하다는 점.


그러나 이성적인 감상만의 영화의 전부는 아니다. 로드무비의 특성인 대책 없음과 몽글몽글함이 적절하게 섞이면서, 눈살을 찌푸릴 수 있는 장면 각각의 장면들이 '별로 말은 안 되지만 대충 웃어넘길 수 있는' 장면들로 나름 적당하게 소화되었다. 이것은 분명 이전 작들에서 보았던 신카이 마코토의 모습은 아니었다. 이전의 두 영화들에서 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극장에서 나왔었으니까.


그가 변태 같다는 인상은 그렇게 바뀌진 않았지만, 진화하고 있다는 느낌은 들었다. 진화하는 변태 신카이 마코토. 차기작이 나온다면 조금은 기대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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