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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해 Jul 03. 2024

[기타를] 로망을 실현하는 일

배우고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로망'이란 말은 단어 자체가 주는 어감조차 참 낭만적인 것 같아요.


제가 가진 로망 중 하나는 취미로 악기 하나쯤 다루는 것이었어요.

엄청 멋들어진 연주는 아니더라도 무심한 척 두어 곡쯤은 척척 연주할 수 있는 정도로요.


제가 고른 악기는 통기타입니다.

노래를 들을 때 반주로 깔리는 통기타의 "끼익!" 하는 소리가 왜 좋은지? (코드를 바꾸다 제가 그 소리를 처음으로 냈을 땐 어찌나 감격스러웠는지!)

게다가 저는 손이 크고 피부가 아주 땐땐하거든요. 살성이 강하달까. 통기타의 쇠줄을 만져볼 기회가 있었는데 제 손가락엔 그 정도 자극쯤 문제없겠더라고요. 소위 '일 잘하는 손'이라 불리는 굵고 짧고 두꺼운 손을 가진 신랑은 어울리지 않게 피부가 연약해서 한번 슥- 만져보곤 아플 것 같다고 바로 항복했는데 말이에요. (낯짝이 두꺼운 것과 상관없이 얼굴 주름은 저한테만 있어서 억울합니다만)


나중에 좀 더 여유가 생기면 해야지 하고 몇 년을 미루다가 작년에 저질러버렸습니다. 골프보다 딱 한 달 일찍 시작했어요. 그러고 보니 작년 가을엔 '하고잡이'의 기운이 강하게 뻗쳤네요. 인생 뭐 있나? 먹고 싶은 거 먹고,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야지!

집 근처 대형마트 문화센터에 통기타 강좌가 있었더라고요. 주변에 기타 전문 학원도 두 군데 있지만 문화센터 3개월치가 한 달 학원비보다 싸니까 부담 없이. 한 분기 동안 기초만 배운 뒤 독학하려고 했는데 기타 독학이 가능하긴 한 건가요??? 좋은 선생님을 만난 덕분에 가을, 겨울, 봄학기까지 꾸준히 등록하고, 수업이 끝나면 마트를 한 바퀴 돌고 장까지 봐서 귀가합니다. 이래서 백화점이랑 대형마트가 문화센터를 운영하는구나...!


뽀얀 살결을 자랑하는 내 기타! 매일 한두 번이라도 연습하겠다는 각오로 거실 한쪽에 자리를 내 준 덕분에 의외의 인테리어 효과를 얻었습니다.


처음엔 제 손끝에서 기타 줄이 튕겨져 소리를 내는 것 자체가 경이로웠어요. 음계 몇 개 익혀 '고기잡이'를 치니 남편이 엄청 신기해했습니다.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나♬ 정작 코드를 짚고 반주를 넣게 되었을 땐 멜로디가 없어서 그게 무슨 노래인지 모르겠다며 갸우뚱거렸지만요. 결코 틀린 게 아니라고 암만 우겨도 소용없.... 

김창완, 아이유의 <너의 의미> 원곡 틀어놓고 연습하는 걸 듣곤 제법 그럴싸하다며 자기도 이제 피아노를 치겠다네요. 설 연휴 즈음 저희 집에 온 전자피아노에서도 추석 전엔 음악 소리가 나려나 봅니다!


제가 기타를 시작했을 때가 마침 <싱어게인 3> 방송 시기와 겹쳤어요. 나도 김수영처럼, 리진처럼, 소수빈처럼! 되겠다는 야무진 꿈까진 꾸지 않았지만 동기부여는 제법 되었습니다. 이제 부정적인 표현을 쓰지 않기로 다짐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 스스로를 똥손이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 기대치가 0이었고, 뭔가를 시작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기쁨을 느꼈고요.

그런데 저보다 늦게 들어온 초등학생에게 추월당하면서 흔들리고 말았어요. 처음엔 선생님께서 진도를 비슷하게 맞추려고 일부러 그 친구 진도를 빨리 빼시는 줄 알았는데 그냥 그 친구가 잘하는 거더라고요. 남과 비교하면 안 되는데, 마흔 살이 되어도 선생님의 칭찬이 고픈 어른이..ㅜ 어릴 때 같았으면 슬그머니 때려치웠겠지만 간신히 마음을 부여잡고 집에서 연습을 좀 더 해야겠다 마음먹었습니다.

봄학기에 아빠와 아들, 엄마와 딸이 함께 등록한 분들이 있었는데 보기 좋더라고요. 그런데 1~2주가 지나면서부터 부모님은 안 오시고 초등학생 자녀들만 다녀요. 심지어 데려다주시곤 밖에서 기다렸다가 같이 가시던데, 다른 사정이 있으셨을 수도 있지만 혹시 잘 안 돼서 일찌감치 포기하신 거라면 좀 안타깝더라고요. 잘하는 모습이 아니라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도 교육적이고, 취미 생활을 공유하는 것 자체로도 참 좋을 텐데... 여름학기에 들어와 한 달 꼬박 채우고 계신 엄마와 아들은 계속 함께 하시길 마음속으로 응원합니다.


(골프나 기타나 그렇게 힘을 빼라는 데도) 힘을 빼는 건 어찌나 어려운지요. 온몸에 힘이 들어가 깁스라도 한 양 손목 스냅 어림없고, 승모근 바짝 성난 어깨 깡패 될 뻔했고. 잘 안 된다고 손가락에도 힘을 준 탓에 관절이 붓는 느낌이었어요. 그래도 이제 힘 빼고 리듬 타는 모양새를 약간 흉내 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손가락 끝에 피멍이 들었다가 굳은살이 박였는데 이것마저 뿌듯해요. 섬섬옥수 따위 포기 가능!

엄지를 제외한 왼손가락 4개는 짧은 손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날도 더워졌는데 네일아트 한 번 해볼까'하는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네요. 스티브 잡스도 이런 식으로 하나씩 포기하다가 청바지에 까만 터틀넥 패션을 고수하게 된 거구나 사알짝 공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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