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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chan Jan 27. 2024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책생각)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는 일

'세상을 살아갈 힘을 잃어버렸을 때 나는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곳에 숨기로 했다'


사랑했던 친형 톰의 죽음은 작가에게 세상의 커다란 의미를 앗아갔다. 인간에게 삶의 원동력은 의미인데, 가장 큰 의미라고 생각했던 자의 죽음 속에서 작가는 길을 잃었고 의미를 다시 찾아야 했다. 하지만 어떤 의미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평소에 절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늘 적절히 반겨주었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 되어보기로 하고 그 아름다운 작품의 바닷속에서 의미를 찾아보기로 한다.


책을 읽으며 문득 톰이랑 사람이 궁금했다.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떤 사람이었길래 작가가 이리 큰 멈춤을 해야 했을까. 아래 문장은 톰을 향한 작가의 마음이 인상 깊게 드러난다.


'형은 몸을 젖혀 소파에 기댄 채로 내 이야기를 듣는다. 마치 머리가 둔해서 내 말을 못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내가 마음껏 이리저리 돌려 말하며 수다를 떠는 여유를 누릴 수 있도록 기꺼이 시간을 내어준다'


이 문장을 쓴 작가의 감정을 헤아려본다. 톰 형이 죽은 후로 이 순간을 기억해 내며 써간 작가의 형을 향한 그리움을 생각해 본다. 문장은 당시의 현실을 이야기하지만 쓰고 있을 당시 작가의 곁에 톰 형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문장을 썼을 때 작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리움에 몇 번을 흐느끼지는 않았을까.

수다를 떠는 여유를 누릴 수 있도록 기꺼이 시간을 내어준다.' 톰 형이 정말로 기꺼이 내어주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느꼈기에 기꺼이 내어주었다고 표현한다. 기꺼이 무언가를 내어주는 것, 어찌 보면 이 세상 속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지만, 이런 마음을 가진 톰이 부러웠고, 그런 형을 마음껏 사랑했던 작가가 부러웠다. 언제쯤 나는 기꺼이 무언가를 내어줌의 아름다운 순간을 존재들에게 선사할 수 있을까. 어떤 기분일까 그런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러다가 형이 병에 걸렸다. 뉴욕은 하루아침에 암 병동의 병실과 형의 퀸스 아파트만 남은 도시가 되었다.'

'형이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뉴욕에서 함께 산 2년 8개월 동안 도시 자체가 변한 것처럼 느껴졌다.'


몇 년 전 코로나가 많은 것을 앗아갔을 때 다니고 있는 교회의 텅 빈 신디가 생각났다. 값이 비싸다며 애지중지 다뤘던 신디가 반주자가 없어 무용지물이 돼 가는 걸 보면서 사람이 없으면 저 비싼 것이 무슨 의미인가 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사람의 삶을 채워주는 것은 결국 존재들이다. 비싼 신디도 아니요, 화려한 뉴욕의 조명들도 아니다. 작가의 세상을 채워주는 것은 형의 존재였고, 그 형이 아픈 이후로 뉴욕이라는 도시는 여전히 빛나지만 빛을 잃어버린 도시가 돼버린다.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여전히 오지만 형 한 명만 남아버린 도시가 되었다. 사랑하는 존재는 세상의 전부다. 그 전부가 아프면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아픔을 대변한다. 


잠들었는데 그 사이에 누가 비디오를 대여점에 돌려줘버렸어. 누구나 고통을 겪지, 내 차례야. 누구나 죽어, 내 차례고... 모두들 늙어가는 걸 보고 싶은데... 크리스타를 행복하게 해 줘. 행복한 추억이 많아. 너랑 이야기한 것도 좋은 추억이야. 영화를 보다 잠이 들었는데 다 끝내지 않은 비디오를 누군가가 돌려줘버린 느낌이야


많은 사람이 영원에 속아 순간을 팔아넘긴다. 그리고 비로소 끝에 이를 때 팔아넘기지 말아야 했을 순간들을 너무 많이 팔아넘겼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톰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좋은 순간들을 많이 간직하고 떠났기에 비교적 덜 실패한 사람이다. 하지만 여전히 끝을 준비하는 것은 어렵다. 톰은 생물 수학 박사를 한 이과남자였고,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건, 살면서 처음 겪는 감정인과 동시에 마지막으로 겪는 감정들이기에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막상 마주치면 가장 어렵다. "영화를 보다 잠이 들었는데 다 끝내지 않은 비디오를 누군가가 돌려줘버린 느낌이야" 마지막까지 논문을 완성시키려고 했을 만큼 삶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톰이기에 죽음은 어려웠다. 그런 톰의 죽음을 지켜보는 작가의 감정도 감히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어려웠으리라 생각이 든다.


톰은 그저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순간을 소중하게 다루는 사람이었다. 순간을 소중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순간을 채워주는 주변 사람들도 소중히 다룬다. 그런 사람의 빈자리는 유독 크다. 왜 작가가 톰 형을 그토록 그리워했을지 조금이나마 헤아려진다.


때때로 우리는 멈춰 서서 무언가를 흠모할 명분이 필요하다. 예술 작품은 바로 그것을 허락한다.


예술 작품을 바라볼 때도 그렇지만, 멈춰 서서 무언가를 흠모해야 비로소 그것이 예술임을 깨닫는다. 예술 작품은 멈춰 서서 흠모함으로써 느껴지는 아름다움의 감정을 손쉽게 알려주는 좋은 브리지 역할을 해주지만, 꼭 예술 작품만이 멈춤을 허락하는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세상 모든 것이 멈춰야지 비로소 오로지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작가는 미술관에 일하면서 수십 번 보아도 새로운 감정을 느끼는 작품들, 그리고 그 작품들을 바라보는 수백 명 명의 각기 다른 반응들을 보며 한 작품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가슴 깊이 받아들인다. 꼭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느끼기로 하면서 자연스럽게 톰 형의 죽음도 소화하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작가가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작가는 마지막까지 삶의 의지를 가졌었던 톰 형의 죽음이 이해가 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왜 우리 톰 형에게 라는 생각, 그 외에 죽음을 향한 수많은 풀리지 않는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 작가는 어떠한 답도 찾지 못했을, 아니 어찌 보면 답을 포기하고 미술관 경비원으로 들어왔고, 10년 동안 일하며 여전히 작가는 톰 형의 죽음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지만, 하나는 깨달았다.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삶을 향한 올바른 태도임을 작가는 수많은 작품을 긴 시간 지켜보며 깊이 깨달았기에 톰의 죽음을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는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보통의 우리는 반드시 무언가 해결해야 하고, 이해해야 하고, 무언가 얻어야만이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하나의 예술작품도 시간이 지나며 다르게 느껴지고, 수백 명 모두 다른 감정으로 소화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역시 개인에게는 그러하다. 그렇기에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그토록 값진 것이다. (오해하지 말아 달라, 억울한 일을 당한 분들을 향한 이야기가 아니다. 수많은 내일들을 살아내는 우리의 삶을 향한 이야기다.) 

아직 젊은 나로서는 앞으로 수많은 일들을 겪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톰 형을 잃고 텅 빈 미술관 아침에 출근하며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하루를 살아갔던 작가의 아침을 떠올릴 것이다. 고독했던 그의 출근길을 떠올릴 것이다. 삶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살아내야 하는 순간들의 연속일 테니.



형, 이 책의 모든 건 형을 위한 거야.


보통 책들의 감사의 말에 보면 가장 중요한 사람에게 마지막 감사를 표하기에 이 책의 특성상 형에 대한 감사를 마지막에 넣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형에 대한 감사의 표현은 초반에 형, '이 책의 모든 건 형을 위한 거야'라는 한 문장으로 짧게 나오고 마지막 고마움은 작가의 자녀들에게 사랑을 표하며 바쳤다. 그리고 이상하게 나는 이 부분이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작가가 책 속에서 마지막으로 얘기했던 작품은 한 15세기 이탈리아 수사 프라 안젤리코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라는 그림이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세상 밖으로 갈 때 가장 필요로 하는 그림이라고 했다.

작품 속에서 예수는 이 세상 가장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지만 작품 속 모든 사람들이 비참해하거나 슬퍼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은 호기심을 느끼고, 지루해하고,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이 꼭 나빠서가 아니라, 그냥 어떤 사람에게는 누군가의 죽음보다 자신이 살아갈 삶이 더 중요할 뿐일 수 있고, 살아감이 바쁘기에 놓치고 누군가의 죽음을 놓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들을 이해하며 작가는 자신이 겪었던 가장 큰 슬픔을 소화해 나간다. 하지만 만약 작가가 이 작품을 톰을 잃은 직후에 이 그림을 보았으면 그림 속 무관심했던 사람들이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0년이란 세월이 지났고 작가의 표현에 따라 작가는 어느 순간 애도의 끝을 애도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받아들이며 소화한다. 10년 동안 자신이 겪은 죽음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오늘을 마주하며, 그리고 이 작품을 바라보며 깨닫는다.

'아무리 중차대한 순간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기저에 깔린 신비로움이 숭고하다 할지라도 복잡한 세상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간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삶은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또 작가는 슬픔에 겨워 쓰러진 어머니를 돌보는 연민 가득한 사람들이 있는 그림 하단을 얘기하며 자신의 향 후 삶의 방향성을 이야기한다.

'수동적인 구경꾼들과 달리 그들의 마음은 같은 방향, 즉 선행으로 향하고 있다. 그림의 이 마지막 부분은 따르고 싶은 모범이다. 내 앞에 펼쳐진 삶에서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필요한 경우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다른 이들도 나를 위해 그렇게 해줄 것이라는 게 나의 희망이다.'


형은 여전히 작가의 삶 속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지만, 작가에겐 지금, 이 순간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있다. 이제 작가는 사랑해야 할 사람들, 미래의 희망에 자신을 더 맞출 것이다. 그것이 형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끝까지 지켜내는 작가만의 너무나도 현명한 삶의 답안이다. 순간을 사랑했던 형의 사랑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순간 속 존재들을 놓치지 않고 사랑하는 일이다.

작가는 작품 속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고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슬픔을 정리하고, 연민의 감정을 느끼며 어머니를 돌본 자들을 보며 자신의 다음 삶의 방향을 세워놓는다. 그렇기에 작가는 애도를 마치게 된 형에 대한 감사를 초반부에 넣었고, 앞으로 사랑해야 할 자녀들에게 마지막 감사를 표하지 않았을까라고 나는 생각한다.


책을 다 읽고,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 작가의 나침반이 된 것을 보며 기쁨을 느낀다. 잊는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충분히 품고받은 사랑을 흘려보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런 단계를 언젠간 밟는다. 누군가는 이미 밟았을 것이고, 각자 시기가 다를 뿐 누구에게나 반드시 온다. 그렇기에 그 시기가 왔을 때 서로 돌볼 것이고, 지나갈 것이고, 다시 사랑하는 이들을 넘치게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나는 작가의 힘찬 의지에 위로받고 작가의 향후 삶을 기꺼이 축복하고 싶다. 그리고 얘기해주고 싶다.

"보통날이네요 어느새, 수고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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