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이 좋았지만 "문송했던" 대학생
나는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영어였고 영어가 좋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로 선택한 전공이었다.
요즘 "문송하다"(문과라서 송구하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취업이나 진로에 있어 문과, 인문학의 위상과 선호도가 현저히 낮은데 내가 대학을 졸업한 2006년에도 이런 용어만 없었을 뿐 상황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펙이 엄청나게 화려한 것이 아니라면, 경영학을 전공한 친구들에 비해 지원할 수 있는 부문이 현저히 좁다는 것을, 지원해도 면접까지 갈 확률이 낮다는 것을 여실히 체감했다.
당시 1) 내가 가고 싶은 회사, 2) 소위 대기업이라 불리는 '좋은' 회사, 2) 이름 좀 들어봤다 싶은 회사 등등 가리지 않고 서류를 넣었었고 아모레퍼시픽은 내 기준으로 1번과 2번에 해당하는 회사였다.
대학생 때부터 막연하게 화장품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가장 가고 싶은 회사는 당연히 "화장품 회사"였고 국내 1위 기업 아모레퍼시픽은 나에게 단연 꿈의 회사였다.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수없이 실패를 반복한 끝에 최종 면접까지 성공하여 최후 통보를 기다리는 회사는 경우 2개만 남았었다 - 금호 아시아나와 아모레퍼시픽이었다.
특히 아모레퍼시픽은 너무 가고 싶었기 때문에 취업스터디에 들어가 입사지원서 작성부터 면접까지 준비를 많이 하긴 했었다. 그러나 비교하자면 금호 아시아나 최종면접을 훨씬 더 잘 봤다. 다른 지원자들이 대답하지 못했던 영어 질문에 혼자 술술히 답했고 비싼 돈을 주고 "금호에서 원하는 인재상"에 맞는 면접 메이크업까지 받고 갔었다.
그러나 결과는 불합격. 역시 취업은 운도 따르고 내가 모르는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함을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제 남은 회사는 아모레퍼시픽. 가장 가고 싶은 회사이자 동시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아모레퍼시픽의 최종 면접을 본 후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머리도 식힐 겸 잠시 집(제주도)에 가 있기로 결심했다. 가 있는 동안 결과가 나올 텐데 합격이라면 기분 좋게 놀다 오면 그만이고 불합격이라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반드시 답을 찾아야만 했다.
최종 면접 순간을 계속 떠올리며 '아 이렇게 대답할 걸, 아 이렇게 말할지 말걸' 하고 얼마나 자책하며 곱씹었는지 모른다. 분명 만족스럽게 잘 본 면접은 아니었다.
(당시 참 다양한 질문들이 있었는데 "엄마랑 아빠 중 누가 더 좋냐"라는 질문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비행기가 제주공항에 도착하고, 꺼두었던 핸드폰을 다시 켜는 순간 문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귀하는 아모레퍼시픽 최종 면접 전형에 합격하셨습니다"
비행기 안이 아니었다면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아무리 봐도 실감이 나지 않는 문자였다. 읽고 또 읽었다. 아마 지금까지의 삶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 세 손가락에 안에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단 하나의 취업 기회이자 가장 꿈꿔왔던 회사였기에 기쁨과 감동이 배가 되었다. 버스를 타고 용산 아모레퍼시픽을 지나갈 때마다 아련하게 바라봤던 그 회사가 이제 "내 회사"가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