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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담 Sep 26. 2023

고시원 사는 부자 할머니의 숨겨진 반전 매력

미쿡에서 온 부자 할머니는 왜 고시원에 살까요?[2편]

그녀의 첫 번째 반전


물 건너 미국에서 오셨고, 쨍한 선글라스와 롤렉스가 눈에 띄었던 고급진 할머니는 유유히 계약을 하고 가셨다. 지내고 있던 다른 고시원에서 짐을 하나씩 하나씩 옮기느라 우리 고시원으로 완전히 이사를 하는 데는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큰 짐이 있으면 옮겨드려야 하나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짐은 매우 단출했다.


어떤 사람들은 고시원에 입실할 때 평생 이곳에 살 사람처럼 엄청나게 많은 짐을 들고 오곤 한다. 2평짜리 고시원에 쑤셔 넣기에는 과분한 이삿짐을 들고 오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그럴 때면 나는 옆구리가 터져버린 김밥을 상상하곤 한다. 억지로 너무 많은 재료를 넣어서 돌돌 말다가 기어이 터져버리는 불편한 상황말이다.


반면, 할머니처럼 정말 미니멀하게 오시는 분들도 있다. 그런 분들을 볼 때면 마냥 기분이 좋지많은 않다. 왠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달까. 특히나 할머님의 연세가 적지 않아서 그런 생각이 더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고시원에 오는 사람들을 관찰하다 보면, 들고 오는 짐의 크기와 종류만 봐도 그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을 파악해 볼 수 있다. 언제부턴가 새로운 입실자들이 이사를 올 때면 몇 개의 캐리어를 들고 왔는지, 어떤 물건들을 가지고 왔는지 자연스럽게 살펴보게 되었는데 그 재미가 나름 쏠쏠하다. 내 생각에 미국 할머님은 왠지 매우 심플하고 깔끔하고 단정하신 분이 아닐까 싶다.


할머님이 완전히 이사를 마무리하던 날 남편과 나는 마음이 쓰여 겸사겸사 고시원으로 나갔다. 우리 고시원에 유일한 고령 여성 입실자 였기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또 한 가지, 마음 한구석이 적잖이 찝찝했던 것은 할머님이 지내실 방이 위치상으로 채광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그 방은 옆 건물과 아슬아슬하게 접해 있어서 외창이라지만 빛이 거의 들지 않았다. 한낮에도 불을 켜지 않으면 낮인지 밤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러한 이유로 지금껏 그 방은 정말 늦은 밤 잠깐 들어와서 잠만 자고 나가는 젊은 남성분들의 차지였다. 무엇보다 저렴한 가격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타입의 고객에게 내어 주는 방이었다. 그런데 젊은 부부 원장의 친절함에 속아 60대 할머니가 덜컥 계약을 하셨으니 내 맘이 결코 편할 리가 없었다.


나라고 그런 방을, 그것도 저 멀리 미국에서 건너와 홀로 고시원을 전전하고 계신 사연 많은 할머님께 드리고 싶었을까.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장유유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족이 아닌가! 이왕이면 어르신이 불편하지 않도록 최대한 좋은 방을 내어드리고 싶었지만, 마침 딱 그 방 하나만 남아있던 상황이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무튼 그날은 고시원에 나가, 괜스레 청소를 하며 할머님 방 근처를 기웃거렸다. 고시원에서 며칠 지내신 소감이 어떤지 영 궁금했기 때문이다. 애꿎은 빗자루와 대걸레를 들고 어슬렁어슬렁 거리던 그때였다. 마침 할머님이 문 밖으로 나오셨다. 오늘도 역시나 깔끔하게 차려입고, 외출을 하려던 참이신 것 같았다.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두 번째 대면이었다.


"엇! 어머니~~~ 안녕하세요. 잘 주무셨나요?"

"오~ 헬로~. 그럼요, 고시원이 아주 조용하고 좋네요. 호호호."

"아.. 정말요? 뭐 불편하신 점은 없으시구요..?"

"네, 아직까지는요. 전에 살던 곳 보다 훨씬 좋은걸요."

"다행이네요. 저희가 엘리베이터가 없어서요. 오르락내리락하시기 힘드시면 아래층에 공실 나오면 옮겨드릴 수 있어요. 다리 아프실까 봐요. 혹시 넘어지시기라도 할까 봐 걱정도 되고..."

"아~아니에요. 아니에요! 나는 지금도 좋아요. 진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여기 옥상이 바로 있잖아요. 나쁘지 않아요. 다음에 또 보자구요. 그럼 난 이만-"


할머님이 계신 방은 맨 위층이었고, 옥상과도 매우 가까웠다. 옥상은 답답한 고시원에서 유일하게 바람을 쐴 수 있는 탁 트인 공간이었다. 한편으로는 흡연자들의 사랑방이기도 했다. 많은 남성 입실자들이 수시로 옥상을 드나들며 연신 연기를 피우는 곳이었다. 그래서 더욱더 신경이 쓰였다. 할머님의 건강에 해가 되진 않을까 냄새에 민감하진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였다.


비록 맨 위층이라 계단은 좀 번거롭지만 워낙 채광이 좋지 않은 방을 쓰고 계신지라 바람 쐬기 좋은 옥상이 가까운 것이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셨을까. 연신 괜찮다고 하시는 걸 보니 생각보다 잘 적응하신 것 같아 조금은 마음이 놓였고, 한편으로는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해 드리지 못하는 것 같아 괜스레 죄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고 긍정적인 모습의 그녀가 대조적으로 애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정확히 30분 뒤, 집으로 오는 길에 차 안에서 남편이 말했다. 


"그 할머님 말이야. 담배 잘 태우시더라. 아까 옥상에서 맞담배 폈어."

"..................? 뭐? 그 할머니가 담배를 피셔???

"응. 대박이지!? 외국에서 오셔서 그런가 엄청 멋있게 피시던데....?"

"아..... 그래서 옥상 가까운 게 좋다고 하신 거구나.... 내가 오해했네."


할머님은 알고 보니 반전 매력을 가진 애연가였다. 단정하지만 패셔너블한 60대 할머니의 기호품이 담배였다니. 다소 충격적이었다. 60대라는 점, 여성이라는 점, 한국에 차마 연락할 수 없는 자녀들이 있다는 점, 상냥한 미소와 말투 등의 단서들을 조합하여 내가 완성한 퍼즐 속 그녀는 다름 아닌 흔한 우리네 '엄마'였다.


당신의 엄마를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들이 떠오르는가? 물론 사람마다 각기 다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엄마의 모습은 술 먹지 마라, 담배 피우지 마라, 건강 챙겨라 늘 잔소리하며 누구보다 '반듯한 품위를 유지했던 엄마'였다. 지금 당장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우리 엄마의 이미지를 더듬어 본다면 감히 담배 피우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야 말로 그녀의 취향은 반전이었다.






양파 같은 할머니의 두 번째 반전 매력


또 하나 그녀와 얽힌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간 할머님은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계셨기에 어느 순간 그녀의 존재를 크게 신경 쓰거나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다른 입실자들 보다 이렇다 저렇다 민원사항도 없으시고 만족하고 지내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날따라 할머님은 나의 인기척이 들리자마자 부리나케 문 밖으로 나오셔서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붙였다.


"원장님 사모님 나오셨네, 아고 반가워라!"

"안녕하세요 어머니~ 그간 잘 지내셨지요?"

"물론이죠. 근데 마침 내가 자기를 진짜 애타게 찾고 있었다니까. 마침 잘 만났다."

"네? 저를요? 왜요?"

"많이 안 바쁘면 잠깐만 내 방에 들어와 볼래요?"

"네...? 방에요? 무슨 일로..."


갑작스러운 그녀의 초대에 순간 얼음이 되고야 말았다. 그간 입실자의 환대와 초대를 받으며 방 안으로 직접 들어가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동안 나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니, 도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방안에 무슨 말 못 할 문제가 있는 것일까? 내가 자리를 비운 열흘 사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할머님은 살갑게 웃으며 내 손을 방 안으로 잡아당겼다. 나는 마지못해 할머니의 손아귀에 붙잡혀 방 안으로 딸려 들어갔다.


"저... 다른 게 아니라, 이것 좀.."


그녀가 방안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 하얗고 네모난 물건을 내밀었다. 그건 다름 아닌 파스였다.


"내가 잠을 잘못 잤는지 며칠 전부터 어깨가 안 돌아가고 담 걸린 것처럼 너무 아프지 뭐예요. 그런데 아무리 해도 손이 닿지를 않아. 효자손으로 이렇게 저렇게 힘들게 부쳐봤는데 영 불편해서 말이야. 이것 좀 붙여줄 수 있어요?"

"아.. 네, 그럼요. 전 또 무슨 일인가 했네요. 이리 줘보세요."

나는 얼른 파스를 집어 들었다.


그녀는 방문을 꽉 닫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웃옷을 훌렁 추켜 올렸다. 대면한지 세 번 만에 그녀의 속살을 보게 될 줄이야. 이것 또한 정말 예상치 못한 전개이다. 그녀는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날 그녀와 나는 공중 목욕탕에서 만난 사이처럼, 거리낌 없는 ‘친구'가 된 것만 같았다.


"이쪽이에요? 여기에요? 여기 맞아요?"

"아... 아니 아니 좀 더 왼쪽.. 아니 오른쪽."

"되었어요? 여기 붙입니다~~~."

"아... 그냥 여기 전체 싹 다 붙여줘요."

"전체 다요? 전체가 다 아프신 거예요?"

"아니, 혼자 있는 동안 또 어디가 아플지 모르잖아요. 그냥 다 붙여놔요. 애기엄마 왔을 때 다 붙여놔야지. 근데 애기엄마 맞죠? 애들은?"

"네~ 애가 둘이에요. 유치원 보내 놓고 잠깐 나왔죠. 그럼 그냥 여기 날개뼈위쪽은 다 붙일게요.."

"ㅎㅎㅎㅎㅎ 아고 애엄마가 예쁘기도 하네. 고마워요~~. 아휴 이제야 살 것 같네."

"별말씀을요. 몸 관리 잘하시고요.... 아프시면 큰일 나요.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할머님의 등짝을 파스로 도배를 해드리고, 방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그때 할머님은 또 한 번 내 팔목을 황급히 붙잡았다.


"잠깐! 이거.. 내가 뭐 줄 건 없고 이거라도 가져가요."

"네? 이게 뭐예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어머님~~ 저 아침 먹었어요. 진짜 괜찮습니다."

"에이... 이거 안 좋아해요? 그러지 말고 가져가~ 고마워서 그래."


할머님이 수줍게 내미신 것은 다름 아닌 기주떡이었다. 하얗고 말랑 말랑해서 우리 첫째가 가장 좋아는 떡이었다. 순간 넙죽 받아서 우리 아이 간식으로 가져다줄까 고민했지만, 이내 사양하고는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왔다. 몇 개 되지도 않는 새하얀 떡을 지퍼백에 담아 비상식량으로 고이 담아두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밥은 잘 챙겨 드시는 건지 매번 떡으로 때우시는 건 아닌지 또 별스럽게 걱정이 되었다.


집에 오는 길에 어느새 우리 아이들의 외할머니가 된, 친정 엄마 생각이 났다. 나는 20살 때부터 혼자 살기 시작해서 엄마랑 한 집에 산 기간이 생각보다 길지 않다. 딱 20년이다. 앞으로 100살까지 산다고 했을 때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 한 이불 덮고 부대끼며 한 집에 산 기간이 고작 20년이라는 이야기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나이를 먹고 보니 20년이라는 시간이 참 짧게 느껴진다.


하필이면 스무살이 될 무렵 엄마와 아빠는 남남이 되었기에, 엄마는 어린 두 동생들을 할머니 댁에 맡겨두고 생계를 책임지러 낮이고 밤이고 밖으로 나갔다. 남의 집 식당일에, 농사일에, 음식 장사에 여자 혼자 몸으로 안 해본 것이 없는 엄마는 늘 삭신이 쑤시다고 했다. 가끔 서울에서 혼자 아등바등 고생하는 큰 딸에게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오늘 같이 힘든 날엔 큰딸이랑 집 근처에서 삼겹살에 소주라도 한잔하고 싶다고 했다.


그때는 그냥 엄마가 오늘 좀 힘들어서 삼겹살이 먹고 싶은가 보다 했던 철없는 딸이었다. 아니, 어린 마음에 나 스스로도 살아내기가 버거워 엄마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고 하는게 맞겠다. 삼겹살이 당기는 날, 혹은 삭식이 쑤신 날엔 파스라도 붙여주며 이런 말 저런 말 들어주는 말상대가 필요했을 엄마를 떠올리자 주책맞게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혹은 걱정을 끼칠까 끝끝내 가족 비상연락망에 전화번호를 적지 않았던 미국 할머니는 어떤 엄마였을까? 어쩐지 고시원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꽤 낯설긴 하지만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


담배와 기주떡을 좋아하는 반전매력의 미국 할머니.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조금 달랐지만 결국 그녀도 누군가의 애틋한 엄마일 것이며, 지금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나 홀로 고시원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국에 계시는 동안 잠시 우리가 그녀의 친구가 되어줄까 한다.





안녕하세요 진담작가입니다.

지난주에 아이들이 감기에 걸려 한 주간 엄청나게 고생을 했습니다. 늦어도 수/목 중에는 한편씩 올리려고 하는데 연재가 늦었네요. 혹시 기다리신 구독자 분들이 있다면 죄송합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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