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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담 Feb 29. 2024

고시원 사는 부자 할머니 이야기(마지막)

그녀가 떠나며 남기고 간 마음

"그 미국에서 오신 할머니 말이야, 좀 이상해."

"왜 무슨 일이야?"

"아니, 글쎄 누가 자기 방에 들어왔다 간 것 같다면서.... 이상한 소리를 하시더라구."

"엥? 진짜? 비밀번호 1234 이런 걸로 해두신 건 아니겠지?"

반전매력을 뽐내는 씩씩한 할머니가 그런 이상한 소리를 했다니, 걱정이 앞선다.



우리 고시원에는 24시간 CCTV가 늘 돌아가고 있고, 틈틈이 모바일로 모니터링도 하고 있다. 그간 이상한 점을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만일 그녀의 말처럼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면 정말 큰일이다. 가끔 남의 신발장에서 신발을 훔쳐가거나 새로 사기 아까운 우산 등을 들고 가는 소심한 사건은 있었지만 말이다. 설마 우리 고시원에 그 정도의 악질은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할머니의 의심이 믿어지진 않았지만,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설령 누가 무단 침입 했다고 한들, 딱히 가져갈만한 것이 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누군가 들어왔다 나갔을 것이라고 의심되는, 할머님이 저녁에 귀가하시기 전까지의, 모든 시간대의 CCTV를 돌려 드나든 사람이 없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원장으로서는 응당 해야 할 일이지만 굉장히 귀찮은 상황이다.어쨌든, 확인 결과 그 방에 드나든 사람도 없을뿐더러 대부분 직장이나 학원에 나가 있는 시간대인지라 왔다 갔다 하는 사람조치 보이지 않았다.



"어머님, 말씀하신 시간대에 저희가 모든 CCTV를 확인해 보았는데요. 아무도 드나든 사람이 없어요. 혹시 뭐 없어지신 것이라도 있으세요?"

"아.. 없어진 것은 없고.. 근데 내가 두고 간 물건의 위치가 달라져 있었어요. 내가 분명 이걸 이렇게 두고 갔는데 나갔다 왔더니 물건이 널브러져 있는 것 같고..."

"음.. 원하시면 CCTV를 직접 확인시켜 드릴 수도 있어요. 일단 비밀번호부터 한 번 더 변경하시고요, 혹시 무슨 일 있으시면 언제든 전화 주세요."

"네. 그래요.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

"아닙니다. 안심하고 주무셔요."

"네, 나 때문에 괜히.. 근데 비밀번호 변경은 어떻게

하는 거죠…..? “

“아……(후.. 아).”




정말 다행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니. 그런데 어째 평소와 다른 할머니의 모습이 영 마음에 걸린다. 그 누구도 드나든 사람이 없고, 피해 상황도 없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 정체불명의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음이 분명하다. 복잡한 송사에 휘말린 상태로 홀로 한국에 건너와 고시원에 머무르고 있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다음 주에는 해외에 계신 남편분과 만나, 일주일간 일본 여행을 다녀오실 거라는 소식이었다. 이 와중에 일본 여행이라니. 당최 이 할머니의 정체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남편과 함께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한결 마음이 나아지지 않을까?



그렇게 시간이 흘러 반신반의했던 할머니의 여행 계획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솔직히 여행 가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혹시 거짓말은 아닐까 잠시 잠깐 의심해 보기도 했다. 대체로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여행을 갈 정도의 여유는 없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백마 탄 왕자님처럼 머나먼 곳에서 훤칠한 할아버님이 날아오신 것이었다! 해외여행을 갈 정도의 형편인걸 보면 최악의 상황은 아닌 듯하다.



일주일이 흘렀다. 캐리어를 끌고 설레는 마음으로 나섰던 그녀의 전화였다.

“원장님, 혹시 주변에 하룻밤 묵을 만한 숙소가 있을까요? 우리 할아버지가 하루 주무시고 내일 가야 할 것 같은데…“

재워달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으셨지만, 어쩐지 빈방을 내어드려야만 할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필이면 마침 잠시 비어있는 방이 하나 있는 건 필연인걸까.

“건너편 대각선 000호가 오늘 마침 비어있어요. 복도 캐비닛에 여분 이불 있으니 그거 사용하시면 될 거예요. “

“정말요..? 원장님~~~ 감사합니다. 비용은 담 달 방값에 더해서 드릴게요. “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그냥 편히 주무세요. “

그래도 역시 계산은 정확하다. 미국식이라 그런가?



모텔도 아닌 고시원에 그녀의 남편까지 묵게 될 줄이야.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하지만 수개월만에 만나 내일이면 또 생이별을 해야 할 노년의 부부에게 도저히 방을 내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방이 조금만 더 넓었더라면 두 분이 편히 같이 쉴 수 있었을 텐데, 한 사람 간신히 누울 수 있는 고시원 침대가 그날따라 어찌나 애석하던지.



흔쾌히 방을 내어 드린 것은 요 근래 이유 없이 불안한 눈빛으로 방어적이었던 그녀의 목소리를 한 층 밝고 편안하게 만들어 준 할아버님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기도 했다. 결국 입십자들의 마음이 편안해야 고시원 원장의 일도 편해진다. 아무리 운영을 효율적으로 잘하고 자동으로 돌아가게 한들, 지내는 사람의 마음이 불편하다면 절대로 무탈할 수가 없다.



어느덧 약속한 3개월이 흘러 그녀는 우리에게 몇 가지를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다음번에 한국에 또 오게 되면 꼭 다시 오겠다는 말과, 미국에 여행 오게 되면 본인 집을 숙소로 제공할 테니 반드시 연락하라는 당부, 그리고 일본 여행에서 선물로 사 온 진한 카카오 초콜릿이 그것이다.




“엄마! 뭐 먹고 있어?”

6살 난 아들이 묻는다.

“아 이거? 어떤 할머니가 고맙다고 선물해 줬어. 맛있네. 하나 먹어볼래?”

“근데 그 할머니가 누군데?”

“있어. 미국에 사는 부자할머니… 친구.“

그녀가 떠나며 이 곳에 남기고 간 것이 찐한 초콜릿 뿐만은 아닌듯하다. 카카오 초콜릿 만큼이나 찐한 여운을 남기고 간 그녀의 근황이 때때로 궁금할 것만 같다.





함께 봐야 할 지난 이야기


시리즈 1

https://brunch.co.kr/@jindam/19

시리즈 2

https://brunch.co.kr/@jindam/20


- 미쿡에서 온 부자 할머니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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