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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담 Mar 24. 2024

쌀과 김치는 무제한 무료 제공, 밥은 셀프?

서울 6평 원룸 평균 월세 100만 원 시대,
사람들은 고시원으로 내몰린다.


"고시원에서 밥이나 라면 같은 것도 제공하나요?"

"네 그럼요, 저희 고시원에서는 밥과 김치를 무료로 제공합니다. 그런데 라면이나 별도 부식은 제공하지 않아요."

“그럼 공과금이나 별도 관리비는요?”

“없습니다. 방 값만 내시면 모두 무료입니다.”

고시원을 찾는 입실자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 중 하나이고, 처음 고시원을 접하는 사람들이 놀라는 포인트이기도 하다.


과거부터 대부분의 고시원에서는 쌀과 김치 그리고 라면을 무료로 제공해 왔다. 여전히 많은 고시원들이 위 3가지 항목을 기본적으로 제공한다. (우리 고시원에서는 쌀과 한국산 김치만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몇몇 고시원에서는 젊은 세대 입맛에 발맞추어, 무료 커피 머신은 물론 시리얼과 우유 그리고 계란까지 제공해 준다.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한 푼이 아쉬운 사람들에게는 정말 엄청난 혜택이 아닐 수 없다. 나도 매번 마트에 갈 때마다 느끼지만 장바구니 물가가 정말 살인적이다.


원룸이 아닌 고시원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일까? 방 크기, 편리한 위치, 관리 수준 등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저렴한 비용이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 요즘 서울 대학가 월세 시세가 6평 기준 평균 100만 원에 가깝다고 한다. 100만 원이라는 금액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월세만 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전기세, 가스비, 관리비 등 각 종 공과금이 추가로 들어가고 거기에 기본적인 식비까지 감안한다면 일반 대학생이나 사회 초년생이 살기에 굉장히 부담스러운 금액이 아닐 수 없다.


이렇다 보니 서울에 살면 금수저 소리를 듣는다고 하는데 자식을 교육시키는 부모 입장에서 참으로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얼마 전 한바탕 대규모 전세 사기 사건이 있은 후부터는 전세 수요가 급격하게 줄었고 불안한 마음에 울며 겨자 먹기로 월세를 선택하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고시원을 시작하기 전에는 과연 고시원을 찾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정말 장사가 잘 될까? 싶은 의심도 약간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운영을 해보니 고시원은 정말 저렴한 가격으로 주거를 해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대안 중 하나였고, 사회적으로도 꽤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지금 당장 살 곳이 필요하지만 충분한 돈이 없는 사회 초년생들이나 경제적 능력이 부족한 노인들은 막상 갈 곳이 없다. 원룸은 최소 500만 원에서 수 천만 원의 보증금이 필요하고 월세는 50~100만 원 선이다. 계약 기간은 최소 1년 이상이다.


반면 고시원의 보증금 보통 5~10만 원, 그리고 월세는 방의 타입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렴한 방은 20만 원대부터 가능하다.(20만 원대의 방은 바깥 창이 없고, 개인 화장실도 없겠지만) 요즘 평균적인 고시원 입실료는 35-45만 원 정도이다. 계약 기간도 제약이 거의 없고 최소 1달 이상이면 대부분 입실이 가능하다. 또한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기본적인 쌀과 김치 등 각종 부식을 제공하기도 하며 인터넷요금, 전기세, 가스비, 관리비도 없다. 생활에 필요한 필수적인 것들은 모두 무료이다. 오직 방세만 내면 꽤 적은 금액으로 한 번에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다.(당신이 2평짜리 공간을 감내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슬기로운 고시원 생활을 위한 불문율,
중요한 건 눈치 싸움


만일 당신이 이런저런 경제적인 이유로 일단 고시원에 들어왔다면, 좋으나 싫으나 고시원 생활에 적응해야만 한다. 각자의 방은 개인적인 공간이지만 공동으로 생활하는 시설이기 때문에 고시원에도 나름의 생활 법칙들이 있다. 저녁시간 긴 통화는 밖에서 하고, 공동 세탁실 이용은 밤늦게 하지 않고, 다 된 건조기 빨래는 다음 사람을 위해 바로바로 가져가는 것 들이다. 하지만 처음 고시원에 오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고시원 생활이 그저 낯설고 두렵고 걱정될 것이다. 그 마음 십분 이해한다. 고시원 원장인 나도 처음 고시원 사업 하겠다고 고시원 임장을 갔을 때 비슷한 감정이었다. 아무리 고시원이 과거에 비해 좋아졌다고 하지만 고시원은 고시원이니까 말이다.


과연 이렇게 비좁은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복도를 따라 촘촘히 들여선 이 개미굴 같은 건물에서 수 십 명이 공동생활을 한다고? 등등 만감이 교차했던 기억이 난다. 허나,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며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차피 다 똑같은 '인간'들이 사는 공간이니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몇 가지 규칙만 잘 숙지하고 조금씩 배려한다면 나름 살만한 곳이 고시원이다.


고시원에 들어오면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다. 제일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소음이다. 구조적으로 소음 차단이 쉽지 않기 때문에 일단 큰 소리로 통화하거나 TV를 보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이어폰 사용은 필수이다. 옆 방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일거수일투족을 들키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뭐, 이런 소음 문제는 너무나도 예상 가능한 부분이기에 더 이상 길게 얘기하지 않겠다.


그런데 일반적인 생활 패턴에서는 생각해 볼 수 없는 재미있는 규칙들도 있다. 그중 하나는 바로 밥 당번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대부분의 고시원에서는 무료로 쌀을 제공해 준다. 수십 명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주방에 밥솥은 단 한 개. 그리고 쌀은 쌀통에 담겨 있다. 고시원 원장은 매일 출근하지 않는다. 가끔 떨어진 쌀과 김치를 쿠팡으로 배송시킬 뿐이다.


그렇다면, 고시원에서 밥은 누가 할까?

정답은 바로 마지막에 밥을 다 먹은 사람이다. 내가 맨 마지막으로 밥솥에 밥을 비웠다면 다음 사람을 위해 직접 밥을 하는 것이 고시원 공용 주방의 불문율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일이 발생한다. 간혹 밥을 하기 싫은 사람이 꼼수를 부리는 것이다. 밥솥을 다 비우면 밥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일부러 밥을 한 숟가락 정도만 남겨두고 밥을 푸는 것이다. 물론 이 밥 한 숟가락은 다음 사람이 충분히 먹을 수 없는 양이기에, 다음 사람이 밥솥을 열어 본다면 분통이 터질 일이다. 게다가 마침 매우 배가 고픈 상태에서 이런 상황을 마주한다면 분노가 치밀어 오를 수도 있다. 만일 이 글을 보고 있는 독자 중 행여나 고시원에서 살게 될 일이 있다면 부디 이런 꼼수는 부리지 말아 주길 바란다.


어릴 적 치열하게 회사 생활을 하며 자취를 하던 때가 생각난다. 그 시절 회사에서는 저녁밥을 주지 않았고, 밖에 나가서 저녁밥을 사 먹고 다시 회사에 돌아와서 야근을 하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서 그냥 저녁밥을 건너뛰고 8시나 9시쯤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가곤 했는데 그러면 밤 9시~10시 사이가 되기 일쑤였다. 물론 집에 가면 당연히 밥은 없었고, 늦은 시간에 밥을 차려 먹으려면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냥 귀찮기만 하면 다행인데 이따금 서럽기까지 하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시간까지 밥도 못 챙겨 먹고 이렇게 일만 하며 사나 싶어서 주책맞게 눈물이 찔끔 난 적도 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이러다가 외로워서 죽겠다 싶어 친한 친구와 3년간 룸메이트 생활을 했다. 늦은 밤 퇴근 하고 집에 돌아가면 늘 서글픈 마음이 들었는데, 가끔 룸메이트가 말도 없이 따끈한 밥과 참치 김치볶음을 해놓고 나간 날에는 그야말로 완전 감동의 도가니였다. 피곤한 몸, 고픈 배, 지친 마음. 그 타이밍에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해놓은 따끈한 밥 한 공기! 그 어찌 감동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고시원도 마찬가지이다. 조금 귀찮아도 팔을 걷어 부치고 기꺼이 쌀을 씻고, 취사 버튼을 딱 한 번만 누른다면 당신은 그날 피곤에 젖어 매우 힘든 하루를 보냈을지 모를 그 누군가의 구세주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고시원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굳이 큰 소리로 반갑게 인사하고 말을 섞지 않더라도 아주 작은 친절과 배려면 충분하다.


또 다른 특이 케이스는 밥을 하긴 하는데 죽도록 밥을 맛없게 하는 유형이다. 다음 사람을 생각해서 양심껏 밥을 해주는 것이 고맙기는 한데, 밥 맛을 보면 차라리 안 하는 게 고마울 지경이다. 얼마 전 SNS에서 알게 된 한 이웃님이 이와 관련된 재밌는 에피소드를 글로 올려주셔서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난다. (고시원 원장으로서 다른 고시원에 사는 입실자가 생생한 고시원 생활의 감회를 올려주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그분은 고시원에 살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인데 본인 고시원에 정말 죽도록 맛없게 ‘돌밥’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밥을 도저히 그냥 먹을 수가 없어 몇 번 심폐소생을 해보려 했지만 답이 없다며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


그리고는 며칠 뒤 또 올라온 소식에는 더 웃픈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입 안을 퍼석하게 굴러다니는 맛없는 돌밥을 하는 당사자를 알아냈는데, 알고 보니 얼마 전 주방에서 마주쳤을 때, 망한 밥 심폐소생 하는 법을 알려달라고 한 사시 준비생이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돌밥을 만든 범인임을 눈치채고 제대로 밥 하는 법을 다시 처음부터 알려주려고 하자, 정작 당사자는 듣는 둥 마는 둥하더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휙 하고 나가버렸다고 한다.


고시원에 거주하는 타인들이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해 놓고 사과는커녕 밥 하는 법을 배울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시 준비생이라니! 불쾌하고 화가 난 심정을 토로한 글이었다.(밥은 생존이 달린 문제니까 충분히 이해한다) 그 사람은 나름 고시원의 불문율을 충실히 따르며 열심히 밥을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민폐가 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된 것이다.


이래서 사회생활이 참 힘들다. 원칙과 규칙을 잘 지킨다 해도 결과가 늘 좋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가끔은 제 딴에 최선을 다 했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기 어려운 것이 우리들 인생이니 말이다.


우리 고시원에 처음 온 날, 주방엔 이런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마지막에 밥을 드신 분은
반드시 밥을 해주세요.


나 역시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린가 했는데 알고 보니 이것은 꽤 중대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우리 고시원에는 밥에 진심인, 고시원에서 적어도 매일 두 끼 식사를 해 드시는 분이 한 분 있다. 요즘 그분이 거의 전담해서 매번 밥을 하시는데, 천만다행으로 실력이 수준급이시다. 그분의 솔선수범으로 인해 우리 고시원은 밥 당번 눈치싸움이 사라졌고 모두가 매일 맛있는 밥을 먹고 있다.(물론 당신이 먹기 위해서 열심히 밥을 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고시원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다음 사람을 위해 맛있는 밥을 기꺼이 하는 작은 배려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출입문이 쾅 닫히지 않게 문을 잡고 잠시 기다려주듯 말이다. 그리고 우리들 삶도 그렇게 친절하고 다정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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