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말 노인들이 은행에 가는 이유
어느 날 오후, 친구의 카톡이 왔다. 반려견 다롱이를 안고 있는 사진, 배경은 은행. 모기가 많아서 품고 있단다. 그리고 이어진 대화들(나, 친구).
"ATM기가 고장 나서 한 대 가지고 기다리는데, 할아버지가 10분 넘게 잡아먹네."
"할아버지들 10분은 기본이지, 통장 10개 갖고 옴ㅋㅋ"
"일부러 양보해 줬는데. 후덜덜덜"
"양보를 왜 해? 할아버지들은 기본 20분."
"'금방 끝나시면 먼저 하세요' 했지. '오래 걸리시면 제가 금방이면 되니까 먼저 할게요' 했는데, 할아버지 노양심ㅋㅋ"
"바보구만. 할아버지들은 원래 엄청 오래 걸려. 젊은이들은 기껏해야 현금 뽑는 게 다인데, 할아버지들은 통장 한 짐 싸들고 나와서 정리ㅋㅋㅋ"
"나도 로또 사려고 만 원 뽑으려는 건데.. 할아버지의 양심 부족.."
예의 바른 친구의 뒤늦은 후회.
“다음부터는 ‘저 돈만 뽑는 거라 금방 하고 비켜드릴게요’ 해~”
달력을 보니 월말이 가까워졌다. 월말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월례행사로 통장정리를 하신다. 월말이 아니더라도 은행에서 노인들은 철저히 아날로그적인 사람들이라 무조건 오래 걸린다. 현금을 인출하러 왔다고 해도 통장정리는 기본이다. 친구는 내 덕에 소중한 교훈을 얻었을 거다.
아무튼 친구의 배려가 불러온 기다림은 장장 20분 넘게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 할아버지가 놓고 간 지팡이도 챙겨드렸다는 친구. 말은 툴툴대도 참 정다운 녀석이다.
예순이 넘으신 우리 엄마도 한 번씩 은행에 종이통장을 챙겨가 통장정리를 하신단다. 은행앱에 들어가서 확인하면 되는데, 굳이 종이통장에 정리를 한다. 엄마는 돋보기를 쓰고 통장을 꼼꼼히 넘겨본다. 노인들은 숫자가 찍힌 증거라도 갖고 있어야 안심이 되나 보다.
생각해 보면 통장정리를 안 한지 오래됐다. 은행앱에 들어가서 확인하면 되니까. 현금보다는 주로 카드를 쓰고, 현금을 써야 할 일이 있으면 은행앱으로 송금을 한다. 그러다 보니 가끔은 돈이 사이버머니 같을 때가 있다. 통장에 월급이 숫자로 찍히지만 그조차 앱으로 확인하고 닫으면 아무 흔적이 남지 않는다. 엄마가 종이통장을 정리하고 간직하는 건 거래를 확인하는 용도도 있겠지만, 종이의 무게나마 느끼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세상은 빠르다. 그리고 노인은 느리다. 느릴 수밖에 없는 게 대부분은 변화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빨라지는 만큼 노인은 더 더 느려진다. 키오스크 주문을 못해서 밥을 굶고 카카오 택시를 호출하지 못해 빈 택시를 기다리는 일들이 자꾸 생긴다. ATM으로 현금을 인출하고 통장 정리라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모르는 편도 아니다. 은행 업무를 못 해서 가족에게 부탁하는 노인들도 많으니까. 우리 아빠만 해도 은행업무는 일찌감치 엄마에게 일임했다.
엄마는 그나마 스마트폰도 곧잘 다루는 편인데 아빠는 여전히 서툴다. 가끔 그 서툰 문자 실력으로 카톡을 보내올 때가 있는데, 카톡 문자가 삐뚤빼뚤해 보일 정도다. 아빠의 비서가 엄마라면, 엄마의 비서는 나다. 엄마도 인터넷쇼핑 같은 건 어려워해서, 그건 내가 전담하고 있다. 오지랖이 넓은 나는 인터넷 서핑을 즐겨하는 데다, 최저가를 찾고 최대한 쿠폰을 먹여 결제하는 일을 좋아하기에 엄마의 랜선 심부름을 기꺼이 해드린다.
아직은 내가 세상의 속도에 곧잘 따라가고 있지만, 나 역시 점점 느려질 것이다. 그럼 내 비서는 누가 해줄까? 난 애도 없는데. 그땐 챗GPT가 해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