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랑 Jan 24. 2022

영원으로의 도피_1

하나가 될 수 없는 ‘너’ 대신 만드는 ‘영원’이란 환상

“안 헤어져, 우리. 우리가 또 싸우면, 또 헤어지면 그때 너는 그냥 이렇게 다시 내 앞에 오기만 해. 그땐 내가 너 붙잡고 절대 안 놓을게.”


최근 재미나게 본 드라마에 나온 대사.

어긋나게만 보이던 서로의 마음이 같음을 확인하는 순간, 지금이 지나면 또 맞닥뜨릴지 모를 잠정적 고통을 제거하고자 다지는 마음.


‘이 손 절대 안 놓을게’, ‘늘 곁에 있을게.’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고자 하는 ‘늘’이나 ‘절대’ 같은 말들이 주는 따스하고 안락한, 안전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환상은 얼마나 달콤한지. 우리는 그곳에 닿는 순간 거기에 안착하고자 한다. 너와 나의 마음이 다르다는 고통의 끝에 찾아오는 ‘하나’라는 신기루의 순간이 영원하기를. 내가 바라던 욕구가 충만히 채워지는 이 순간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 너와 내가 다름을 느끼는 불화의 순간, 그 갈등과 좌절에서 밀려오는 싸아한 불쾌감이 사라지고 온전한 충만감이 나를 에워싸는 그 희열이 계속, 계속, 끝없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자연스럽고도 나약한가. 사랑에 관한 수많은 노래와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변하지 않는 둘만의 영원한 사랑’에 목을 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만큼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염원이기 때문이다.


알베르 카뮈는 이와 같은 “친숙함에 대한 요구이며 분명함에 대한 갈망”인 무의식적 감정을 “향수”라고 말한다. 나와 하나가 될 수 없고, 그래서 납득할 수 없는,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타인을 비롯한—를 마주했을 때 이런 무의식적 감정이 올라온다고 그는 설명한다. 낯설고 다른 너의 것들을 빨리 내 안에 친숙한 것과  ‘통일’시켜 분명함을 얻고 싶은 마음.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통일한다는 것”이다. 카뮈는 “이해”라는 사고 과정이야말로 “인간 정신의 깊은 욕구”라고 말한다. 낯설고 다른 너와 대치된 상황에 이는 싸아한 분리감, 그 좌절을 견디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빨리 나와 다른 너의 것을 나의 입장에서 내가 친숙한 것들과 비유하여 이해해—통일시켜—버리고 갈등을 제거해 버린다. 또는 납득할 수는 없으므로 ‘나는 이렇고, 너는 그렇다’ 식의 다양성을 내세워 나의 갈망을 잠식시켜 버린다. 어떤 방식이든 갈등에서 오는 불쾌한 감정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순간의 희열—내가 너를 이해했다는 데서 오는 일치감—이나 편안함—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체념에서 오는—을 지속하고 싶어 한다.


카뮈가 말하듯 이 과정이 인간 정신의 깊은 욕구이며 향수라면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우리에게 다른 선택이 가능하긴 한 걸까?


‘지금’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의 이면에는, ‘지금’이 ‘영원’이 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쌍둥이처럼 함께 한다.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는 대부분은 이 ‘영원’을 좇는 신념에서 비롯된다.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마음속 깊이 뿌리내려 만들어낸 신념은 ‘모든 것을 너에게 맞추면(너의 마음에 들게 내가 행동하면) 너는 나를 혼자 두지(떠나지) 않을 것이다’였다.(나 vs 나_1 참조)


너에게 맞지 않는 나를 드러낸 일과 그로 인해 내가 혼자 남겨진 일은 반복적으로 일어났지만 그것은 하나의 대상(엄마)과의 경험이었다. 나는 혼자 남겨지는 순간이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엄마와의 경험을 모든 타인에게 적용시켜 내가 만든 신념 안에 나를 가두었다. 혼자 남겨지는 순간이 영원하리라는 두려움에 어떤 대상에게나 ‘통일’하려는 과도한 시도를 해 온 것이다. 모든 사람을 이해하려고 했고, 그러기 위해서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평가하기를 금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어떠한 공감도 일어나지 않고, 나에게 들이대는 잣대만큼이나 엄격한 잣대를 타인에게 부지불식간에 들이밀면서도 ‘그러면 안 된다’고 믿었으므로 타인에게나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다. 자연히 행동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의 울타리들에 둘러싸여 말 그대로 ‘내 맘’인 생각조차 자유롭지 못했으니 행동은 오죽했겠는가.


두려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게 하리라는 노력이 더해질수록 나에게 가해지는 제한들은 늘어났음에도 내가 그 ‘영원’의 신념을 놓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행복한 순간을 영원히 지속하게 하려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그 믿음 체계 안에 있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안전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적어도 ‘영원’으로 이어질 ‘지금’에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고, 하고 있다는 통제감이 나 스스로에게 안전할 것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믿음이 얼마나 허망하리만큼 비이성적인 논리인지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마치 내가 안전하다는 걸 한번 경험한 길목이 ‘안전하리라 믿는 비합리적 신념과 같다.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 어떤 길목을 하나 선택했는데 안전하게 목적지에 닿는 경험을 했다고 하자.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이는  길목이 ‘안전하리라는 믿음으로 같은 목적지를 가고자    길만을 가기를 선택한다, 고집스럽게. 목적지에 닿는 길은 너무나 다양하고 많은데도.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라. 내가    보고 안전함을 경험한  길목이 다음번에 안전할지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가본 길목은 다른 수많은 길들과 똑같은 확률의 위험 요소를 지니고 있다. 내가 그날 경험한 안전은 다른 수많은 길이 가진 확률만큼의 안전이다. 그저 내가 안전하다고 ‘느낄, 그래서 그렇다고 ‘믿을뿐, 내지는 '믿고 싶을' 뿐이다.


나의 신념 역시 그런 것이었다.

엄마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하면 나는 혼자 남겨진다 것은 다른 대상들에게 적용할  없는 문제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마음에 들지 않게 내가 행동한다고 해서 모두 나를 혼자 두는 선택을 할지는   없다. 나의 신념을 엄마라는  사람에게 국한하는 것은 어떤가? 엄마는 내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하면 ‘늘’ 나를 혼자 두었나? 물론 그렇지 않다. 손님이 없을 때는 내게 여과 없이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고,  행동의 이유를 묻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가   가지 경험물론 여러 번 반복되었지만 다른 모든 경험은 배제하고 확대하여 ‘엄마는 그렇다 여기고, 그러므로 ‘다른 이들도 똑같이 그럴 이라고 생각한 이유, 그리고  생각을 하나의 신념으로 선택한 이유는 (카뮈의 명철한 통찰대로) 그것이 인간 정신의 깊은 욕구이자 향수이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아까의 질문으로 돌아와 볼 차례다.  

우리 안에 그토록 깊은 욕구와 향수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다른 선택이 가능한가.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면 왜 다른 선택을 해보아야 할까. 다른 선택과 그에 따른 행동은 어떤 다른 결과를 가져올까.


_다음 글에 계속

작가의 이전글 하나가 될 수 없는 너와 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