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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랑 Jun 16. 2022

"영원한 현재"

-'영원으로의 도피'가 아닌 지금을 살기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미정이와 구씨의 '해방'이 뜨거운 요즘이다.


'나를 드러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가 끊어지고', '그렇다면 앞으로 나는...?'

그때 '관계의 주인은 누가 될까?'를 고민함에 있어 완벽한 모델이 드라마 속 캐릭터로 등장했다.


상대가 나를 떠날까 두려워 상대에게 나를 맞추던 과거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나를 드러낼 때 나는 나도 모르게 과거와는 다른 결과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 기대는 얼마 가지 못해 산산이 부서진다. 관계에 참여하는 대상이 둘 인 만큼 관계의 이어짐과 끊어짐은 나만의 결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가 관계를 떠날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 분리감이 현실이 된다. 상대는 내가 어떤 갖은 노력을 해도 자신의 이유로 떠남을 결정할 수 있다. 나의 질문은 <나를 드러내고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나를 숨기며 노력하는데도 관계가 끊어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자유의 차이라고 했다.

내가 너에게 나를 드러낼 수도, 또는 숨길 수도 있는 자유. 그 선택의 주체가 나라는 것. 너와의 관계를 잃고 싶지 않아서 너에게 나를 감출 때 감추기를 선택하는 것은 나지만 그 기준은 너에게 있다. 네가 무엇을 좋아할까 또는 싫어할까 가 나를 드러내고(네가 좋아하는 것) 감추고(네가 싫어하는 것)의 기준이 된다. 이때 선택은 내가 하지만, 기준이 너에게 있기에 나는 그 선택을 네가 한다고 느낀다. 그래서 사실상 여기에는 자유가 없다. 선택의 여지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를 드러낸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감정과 욕구에 내가 충실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것을 알아차리고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 내가 원하는 바를 알아차리고 상대에게 요구하는 것. 그리고 이때 그 관계가 사랑을 전제로 한다면 나는 나를 드러내는 것 이상의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미정이는 구씨에게 당당하게 요구한다. "나를 추앙해.”

하지만 그녀가 추앙—무조건적인 응원을 담아 상대를 우러르는 행위—받기 위해 그녀는 먼저 자신이 상대방을 추앙한다. "내가 너를 채울 거야."라는 결연한 의지로. 그녀는 구씨를 채운다. 그가 무엇을 좋아할까 싫어할까에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상태—삶을 체념한 채 목숨을 연명하듯 낮을 살고 술에 기대어 밤을 사는—를 관찰하고 <있는 그대로> 그를 받아들인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상태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그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를 응원하는 것이다. '잘 될 거야.' 그리고 그를 위한 바람을 갖는 것. '네가 감기에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녀는 온전히 응원하는 마음으로만 상대를 대하기에 상대의 반응에는 큰 관심이 없다. 아니,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문자를 보내고 하루에도 몇 번씩 그녀는 그와의 문자 창을 확인하다. 카톡의 1자가 사라졌는지를 궁금해하며). 하지만 그의 반응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다. 문자에 답이 없어도, 따스하게 느꼈던 순간도 잠시, 다시 그가 차가운 기운을 내뿜는 순간에도, 그녀는 그의 상태에 반응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에만 반응한다.

'나는 너를 채울 것이다.'


그렇게 미정이는 자신을 드러낸다. 속으로만 곱씹던 생각들을 입 밖으로 뱉는다. 상대의 반응과 상관없이. 자신이 느끼고, 원하는 바를 가감 없이. 미정이가 자신을 드러내는 힘은 상대를 온전히 추앙하는 자신의 의지를 실행하는 힘으로부터 온다. 그렇게 채워줌으로 미정이는 자신을 채운다. 채우는 행위는 타자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행위를 하는 나, 그 주체로부터 온다.


미정이의 온전한 응원과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에 대한 노력과 상관없이 구씨는 떠난다. 자신의 정체된 삶을 풀어내야 하는 과제가 있는 곳으로. 그의 떠남은 미정이의 행위와 어떤 연관성도 없다. 그는 떠나야만 한다. 미정이는 그가 떠나는 것에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슬프다고 말한다. 그가 스스로의 삶의 과제를 행하기 위해 자신을 떠나야 하는 것이 슬픈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뜻을 '배신'한 상대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대를 잃어야 하는 '상실'이며 그로 인한 슬픔이다. 다시 말하면, 분노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인다. 그리고 이때 배신당하는 것은 주체 자체가 아니라 주체가 가진 '자신의 뜻'이다. 미정이는 애초에 이 관계 안에서 '자신의 뜻'을 정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채우겠다는, 추앙하겠다는 의지만을 가지고 이를 실행했기 때문에 배신당할 자신의 뜻 따위가 없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온전히 상대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며 응원하는 것이다.


이때 이 관계의 주체는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 관계를 떠난 구씨인가? 관계의 주체는 관계의 맺고 끊음을 결정하는 이인가?

그 답을 우리는 그들의 재회 장면에서 볼 수 있다. 관계의 주체는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주체, 미정이 그리고 구씨, 두 사람 각각이다. 내 눈앞에 있고 없음과 상관없이 상대를 온전히 존중하고 응원하며 기다리는 마음을 가진 이가 관계의 주체다.

미정이도, 구씨도, 당장은 눈앞에 없는 '너'를 마음속에 간직하며 관계를 이어갔다. 그리고 그 이어짐은 결국 물리적인 만남을 이끌어낸다. 물리적인 만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상대를 추앙하는—사랑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마음을 품고 있는 한, 관계의 주체는 나다.


첫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나를 드러내고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나를 숨기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계가 끊어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나의 해방."


나를 드러냄으로써 나는 너와의 관계가 유지되는가 되지 않는가의 기준, 그 틀 안에 갇힌 나로부터 해방된다. 그렇게 내가 해방되고 나면 이제 관계가 '유지되는가 되지 않는가'는 그 중요성을 상실한다. 관계가 —물리적으로—유지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이제 너를 온전히 바라보고 기다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너를 채움으로써 나를 채우고, 그 힘으로 나를 드러내는 주체만이 누릴 수 있는 '해방', 곧 '자유'라는 선물이다.


이것이 바로 미정이와 구씨를 통해 [나의 해방일지]가 전하고자 한 '해방'의 메시지가 아닌가 감히 생각해본다.


유지하고픈 상태가 영원할 수 없다.

고통스러운 상태 역시 영원할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지금, 여기에서 내가 선택하는 나의 순간 뿐이다.

지금, 여기에 나의 해방만이, 그다음 순간도, 또 그다음 순간도 나를 해방으로 이끌 수 있기에,

지금, 여기에 나의 선택만이 '영원한 현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나는

나를 선택할 것인가,

너를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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