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뮤즈 Apr 07. 2022

흐린 날에 파란 하늘을 보는 방법

내가 가장 갈망했던 파란 하늘

 앙상한 나뭇가지만 흔들리던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왔다. 메말라 누렇게 바랜 잔디 사이로 푸릇푸릇 새 풀이 돋아난다. 꽃말이 중간고사라는 웃픈 사연의 벚꽃도 모습을 드러낸다. 강인한 들꽃의 대명사 민들레가 단단한 아스팔트를 비집고 자라난다. 온통 무채색이던 세상이 색색이 물들어간다. 하늘도 색칠놀이에 동참하듯 연일 맑은 날씨를 보인다.


 문득 핸드폰 속 사진첩을 천천히 돌아보면 유독 푸른 하늘이 가득 담겨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하늘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잡념으로 가득 차 있던 머리가 저 하늘을 따라 깨끗해지는 기분.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그래서 나는 맑은 날씨를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파란 하늘을 이불 삼아 쏟아지는 햇빛을 만끽하는 날에는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가벼운 우울감을 떨치는 데 맑은 날 햇빛 보며 산책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말을 괜히 하는 게 아니다. 날씨가 뭐라고 사람 기분을 들었다 놨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부턴가 하루의 기분이 날씨를 따라간다며 날씨 탓을 하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노란 햇빛 때문에 절로 눈이 떠지면 알람이 울리기 전이어도 짜증을 내지 않는다.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까. 반면 아침부터 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를 볼 때면 알람이 몇 번이나 울려도 미적거리기만 한다. 날씨가 좋지 않으니 몸도 마음도 축축 처진다. 영 힘이 안 난다. 푸른 하늘을 보면 한결 나아질 것 같은데. 겹겹이 쌓인 검은 구름은 조금의 틈도 내어주지 않는다. 머릿속에도 덩달아 짙은 안개가 낀다.


 그런 나에게 겨우내 눈이 오는 날이나 여름철 장마는 그야말로 우울의 끝이다. 끊임없이 먹을 수 있을 것만 같던 떡볶이를 먹어도, 잔잔한 힐링을 느끼게 하는 예능을 봐도 감흥이 없다. 문득 시선이 바깥으로 향할 때면 저 시커먼 하늘이 얄밉기만 하다. 지금 내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날씨 때문이야. 속으로 생각한다. 이 상태로 혼자 있다간 우울의 심해로 빠져버릴 것 같아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무거운 두 다리를 이끌고 멀리 갈 수는 없으니 집 근처 스타벅스로 들어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파란 하늘을 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파랗게 보이는 것 같은 하늘을 보았다. 이 건물의 통유리창은 약간 푸른빛을 띠고 있다. 그래서 안쪽에서 바깥을 보면 모든 사물이 조금씩 파랗게 보인다. 어릴 적 백색 형광등에 형형색색 셀로판지를 대어 보는 것과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우와, 하고 작게 감탄했다. 조금 전까지 세상을 집어삼킬 듯 검은 구름이 가득했던 하늘이 온통 푸르게 보였다.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비록 대단한 착각일지라도 나를 다시 일으켜주었다. 주문한 음료가 실내의 온기에 식은땀을 흘릴 때도 나는 한동안 창밖만 바라보았다. 구름 너머 해가 완전히 져서 까만 밤하늘이 드리울 때까지.


 어쩌면 기분이 좋든 나쁘든 일렁이는 감정의 원인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정말 기분이 좋았던 이유는 오늘 하루 여유롭게 푹 쉴 수 있기 때문인데, 때마침 날씨가 좋았다. 기대하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우울했는데, 하필이면 날씨도 우중충하다. 나는 진짜 원인을 가슴 저편에 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너무 소중하거나 아쉬워 차마 꺼내볼 수조차 없어서. 그래서 날씨 탓을 하며 나를 방어하려 했다. 내가 행복을 즐기는 방식이자 우울을 떨쳐내는 방식이었다.


 행복을 배로 즐기기 위해 파란 하늘이 필요했다. 그리고 슬픔을 덜어내기 위해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착각이 필요했다. 그렇게라도 나를 지키고 싶었다.

작가의 이전글 퇴사는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후회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