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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Aug 23. 2024

나라는 인간의 책 읽기

입추도 지나고 처서도 지나니, 절기상으로는 그야말로 가을이다. 아직도 더워서 맥을 못 추긴 하지만 나의 동물적 감각에 의하면 독서의 계절 가을이 멀지 않았다. 하지만 식물적 감각에 의하여 나는 막상 그때가 되면 또 이것저것 핑계 삼아 책 읽기는 뒷전이 될 것임을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에 대해, 나는 요런 킹리적 갓심을 가지고 있다. 가을은 독서하기엔 너무 좋은 날씨라서 아무도 독서를 안 하니깐 나온 말 아닌가 하고.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니 말도 살쪄야지, 햅쌀과 햇과일이 나오니 나도 살쪄야지, 손 꼭 잡고 데이트도 하고 여행도 다녀야지, 이래저래 바빠 죽을 지경인데 말이에요 :P


가을은 왜 독서의 계절일까? 민속학적 접근으론 농경사회에서 추수 후 농한기의 여유 때문이라 하고, 기상학적 접근으론 온도와 습도가 적합해서라 하고, 물리학적 접근으론 이 시기의 가시광선 파장이 독서에 적합해서라 하고, 생물학적 접근으론 일조량 감소로 세로토닌의 분비가 줄어 마음이 가라앉아서라 한다. 그런데 정작 통계는 책이 가장 많이 팔리고 대출되는 시기는 추위의 절정인 연초와 더위의 절정인 한여름이라고 말하니, 그 모든 이유들은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일단 결론부터 짱박아 놓고 나중에 붙인 이유임이 틀림없다.

만약 사람들이 가을에 라면을 많이 먹는다면, 어쩌면 진짜로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계절을 탓할 것도 없이 책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 많이 읽어야 쓰기도 잘할 수 있는 건데 그러지를 못하니 아는 게 없어서 쓰기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브런치 작가'니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니 하는 어색한 말이 이름 앞에 붙어 있는 지금도 내 독서량은 민망한 수준이다.


일단 너무 느리다. 멈추고 찾아보고, 툭하면 딴생각에 빠지고. 겨우 페이지를 넘어가면 내가 정말 이해한 게 맞나 싶어 앞으로 다시 돌아가기 일쑤다. 내 고질적 문해력 부족 때문이다. 한데 그렇게 읽으면 내용이라도 잘 기억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어서, 누가 그 책에서 어떤 게 특히 인상적이었는지 말해 보라고 하면 "어, 그게..." 하며 옹알이만 한다.


책 베고 자기만 해도 지식이 들어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책이란 책은 다 베고 잘 텐데.

예를 들면 이렇다. <조선의 민낯>이라는 책을 읽다가 불현듯 궁금해졌다. 우리 역사에는 왜 우정에 관한 이야기가 없지? 우정의 모범으로 어린이들에게 말해줄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김유신-김춘추는 친하긴 했나 보지만 그 둘은 어쩐지 권력과 거래 이야기에 가까워 보여서 사뭇 다크하다. 성삼문-박팽년도 아주 친했다지만 그러자면 계유정난과 사육신 얘기를 꼬마들에게 해 줘야 하는데 통 엄두가 안 나는 일이다.


오성과 한음을 떠올릴 분이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승정원일기>는 고종이 한음의 후손 이병교에게 "오성과 한음 이야기가 정말인가?"라고 묻는 상황을 전한다. 두 사람이 친했던 건 맞지만 실제로는 둘이 처음 만났을 때 이덕형은 18살, 이항복은 23살이었다. 어린 시절의 오성과 한음은 모두 재미로 지어낸 이야기다. 어차피 사실도 아닌데 재미마저 없었다면 누가 읽을텨?


우정이라면 전두환-노태우를 이길 쌍이 있을까? 그 둘은 동기로서 같이 학교를 다녔고, 월남 파병도 같이 갔고, 친구가 위기에 빠지자 최전방의 병력을 빼돌려 궁지에 몰린 친구를 구원했고(허그덩!), 나중에는 대통령도 차례대로 했다.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두환과 태우’를 읽어 줄 것인가? 사례가 없어서 남철-남성남까지 끌어와야 할 판이다. 하이고, 어쩜 좋담. 선생님들은 정말로 대단하시다. 특히 어린이 맡으시는 선생님들. 근데 나 지금 뭐 하고 있나. 선생도 아닌 것이. 책이나 읽어라, 좀!


그렇게라도 다 읽으면 다른 책으로 넘어가느냐, 아니 그렇지 않다. 한동안 멍하니 지내다가 쿨타임(cool time)이 지나면 그 책을 또 꺼내든다. 봤던 책 또 보기, 그건 소년 시절 들었던 노래를 세월 지나 다시 들었을 때 몸 안에 흐르는 다른 느낌이다. 오래전 갔던 산사를 다시 찾기와도 비슷하다. 수백 년 전부터 거기 있었는데 처음 갔을 그때는 안 보이던 단청과 부도가 눈에 들어온다. 하늘을 향해 모서리를 살짝 들어 올린 석탑을 바라본다. 나 대신 이 자리에 서 있었을 사다리를 생각한다. 그 꼭대기에 위태하게 앉아 주심포 양식의 대웅전 지붕을 수놓던 이의 손놀림을 생각한다. 절 전체의 풍광이 천천히 가슴에 안겨온다. 그렇게 책과 사귄다.


이런 식이니 속도가 나올 리 없고, 읽은 책도 많을 수가 없다. 쓸데없는 생각이 많다는 건 어릴 때부터 수없이 받아 온 지적이고 열 살 때는 선생님께서 성적표의 의견란에 "두뇌 회전이 느리고 엉뚱한 면이 있음"이라고 써 주신 게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그런데 어떤 생각이든 그 책을 읽다 파생된 생각인데 쓸 데 있는 생각과 쓸데없는 생각의 기준은 뭘까? 이 자체도 쓸데없는 생각인가?


"일 년에 몇 권 읽으세요?" 언젠가 이 질문을 받았을 때 두세 권이라고 한 적이 있다. 책 읽기 좋아한다며 일 년에 두세 권? 개 풀 뜯어먹는 소리가 따로 없다. 이때 상대의 반응은 놀라거나 빵 터지거나다. 이어지는 질문은 '고전 읽어봤냐'다. 파우스트는 어릴 때 시작해서 아직도 다 못 읽고 있다. 노인과 바다는 저자가 헤밍웨이인지 톨스토이인지 자주 헛갈린다. 한 명이 껄껄 웃으며 한 마디를 던진다.


"책 별로 안 읽으시네!"


존댓말과 반말의 경계에 묘하게 걸친 이 말은 내겐 '당신은 잘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좋아하는 걸로 보이지도 않소'로 들렸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애초에 같지 않다. 잘하지 못해도 얼마든지 좋아할 수 있다. 느려도, 남들처럼 많이 읽지 못해도, 읽고 있는 시간이 즐겁다면 좋아한다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책 좋아한다 말하길 꺼린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일 년에 몇 권 읽느냐" 이 물음을 피할 수가 없어서. 이건 책 하나를 읽어 낸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고민이 들어있지 않은 물음이라서. 나는 내 독서법이 있고 내 고유 속도가 있는데 그게 평균이하라고 나의 책사랑까지 덩달아 평균 이하로 의제하는 억울함에 질려 버려서 아예 그 화제 자체를 기피해 버린다.


읽는 데 오랜 시간을 들이고 나중에 그 책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해도, 책 몇 권 읽었냐는 질문에 '한 권!'이라고 대답해서 물은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어도, 읽는 동안만이라도 치즈 속에 들어앉은 생쥐의 기분을 느꼈다면 내 기준에서는 충분히 성공한 독서니까. 시험 보려고 책을 읽는 것도 아닌데 속속들이 기억하려 애쓸 필요도 없고, 단 한 구절만 기억나도 그게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다면 충분히 의미 있는 독서 아닐까? 어쩌면 그 한 구절을 찾으려고 책을 펴드는 건 아닐까?


그래, 나는 책을 못 읽는다. 그래도 좋아하긴 한다. 좋아한다고 말했다가 핀잔을 들은 이후 쏙 집어넣었다가 다시 그 말을 꺼내들 수 있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나 자신에게도 '나, 책 좋아하나?'라는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어쩐지 책을 끝까지 읽고는 누가 그 책에 대해 물으면 명료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나, 책 좋아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실은 예전에도 지금에도 그렇지 못하지만(그리고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테지만), 싱어송라이터 장기하 님도 지금의 나와 똑같은 문제로 고민한 적이 있었다니 반가움에 그의 한마디를 빌려 보고 싶다.


상관없는 거 아닌가?


그래, 상관없는 거 아니냐고. 나는 앞으로도 책을 잘 못 읽을 것이지만 여전히 책을 좋아할 것이니까. 그러니 제발 누가 나한테 작년에 책 몇 권 읽었냐는 둥, 읽은 책이 그것밖에 안 되는데 책 읽기가 취미라니 뭐지 하고 이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지 좀 말았으면 좋겠다. 꼭 무슨 여진족이 쳐들어와서 털리는 느낌 나서 내가 아주 그냥 꽥 돌아가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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