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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뿌니뿌니 May 28. 2022

과거를 곱씹기 딱 좋은 전화번호부 3

지울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B는 나름 친한 대학 후배였다. 그의 이름과 회사, 심지어는 그 회사의 실장 이름까지 내 전화번호부에 있었으니까. B는 나와는 삼사 년쯤 차이가 있어서 같이 수업을 들은 적은 없었고,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건너건너 알게 되고 그렇게 친해진 사이였다. 실력도 꽤 있었고 그래서 단가도 꽤 쎈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B의 아버지는 이 분야에서는 꽤 명망 있는 대학 교수였는데 내가 C사 디자인실에서 근무할 당시 자문위원을 하신 적이 있어서 나름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연륜도 있으시고 성격도 좋으셔서 흔히 노장에게 볼 수 있을법한 꼬장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주 젠틀하고 댄디한 그런 분이셨다. 수업 중에도 함부로 학생들을 대하거나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그런 분은 아니셨다. 이 분에게 배웠던 제자가 어린 나이에 다른 학교에 교수로 부임했는데, 이 노교수님은 그때부터 바로 이 제자에게 경어를 쓰기 시작하셔서 제자분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참 연배도 아래인데다가 제자였지만 대학 교수라는 직함을 달았으니 동료로서 예우하기 위함이셨다. 그런데 사모님이 병으로 일찍 돌아가시고 이 분도 그 후에 얼마 있다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내가 알고 있는 후배 B는 졸지에 남매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장녀이자 가장이 되면서 좀 힘들어했다. 그래 보였다. 손사래를 치고 아니라고 했지만.


B는 꽤 일을 잘했다. 공부를 오래 해서 그런가 도통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버님의 유작을 정리하는 것도, 자신의 회사를 운영하는 것도,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도 모두 B의 버거운 일이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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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있는데 B로부터 전화가 왔다. 좀 큰 디자인 프로젝트를 맡아서 정신없고....... 어디서 나올 돈이 있는데 그게 잠겨서...... 그게 해결되면 드릴 테니까...... 돈 좀 융통해 주세요 한다. 야박하게 거절하기도 애매하고 또 그 당시에 여윳돈은 좀 있었고 해서 흔쾌히 그러마 했다. 이자는 필요 없다는데 굳이 꼬박꼬박 이자도 들어오고 원금도 한꺼번에는 아니지만 나뉘어서 들어오곤 하였다. 그러더니 다 갚을 때쯤 큰돈을 다시 빌려달고 하여 역시 그러마 하고 주었는데 이번에는 좀 분위기가 달랐다. 이자를 기대한건 아니었지만 저번과는 양상이 좀 달랐다. 이자도 들어오지 않았고 전화를 받지 않기 시작했다.  빌리고, 깊고, 더 빌리고, 밀리고의 과정이 어디서 꼭 들어본 듯한 스토리를 닮아서걱정이 되었다. 다른 친한 동창들에게 전화를 돌렸더니 다들 얼마씩 B에게 빌려주고 있는데 그들도 모두 조금씩 이상함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후배에게 돈 갚으라고 전화하는 건 빌려달라고 전화하는 것만큼이나 불편한 일이고, 또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과도 채무관계가 있다면 B는 얼마나 괴로울까 생각하며 며칠을 고민하고 나서 B에게 전화를 했다. 어렵게 연결된 통화에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까 나름 고민했는데, B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러마 하고는 고맙게도  다는 아니지만 일부를 송금해 줬다. 그렇게 두 번에 나누서 송금을 하고 얼마간의 잔금을 남았을 때는 연락이 아예 두절되었다. 소위 잠수를 탄 것이었는데 듣기로는 몇 건의 소송도 걸려 있었고 이로 인해 건강도 많이 안 좋다 했다.


사실 나머지는 굳이 받을 생각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후배로서 이 상황에 대해 조금 솔직히 말해 준다면 좋았을 것이었다. 그것이 투정이어도, 부탁이어도 괜찮았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소문이 썩 좋지도 않았고 그냥 사정을 솔직하게 말해주면 그걸로 됐다 할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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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B는 그 후에 잡지사도 인수하고 회사도 실장 체제로 계속 운영이 되고 있다는 거였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월급쟁이와 생각이 다르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는데 이런 상황도 그냥 그렇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를 무시하겠다는 의도였으니까. 그렇게 B에게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슬쩍 들었다.


하지만, 그런데, 나는 B가 싫지 않았다. 원망도 없었다. 그저 얼마나 힘들었을까 했다. 인수했다던 그 잡지를 정기구독까지 해주면서 그저 잘 되기만을 바랐을 뿐이었다. 나는 B에게 진심이었지만 그는 나에게 진심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많이 힘들었을 테니까. 오죽하면......


B의 이름은 삼사 년 후 내 전화번호부에서 사라졌다. 회사 이름도, 실장의 이름도 같이 사라졌다. B가 더 이상 내게 의미가 없어진 것은 물론 아니다. 그저 B를 나에게서 지워야만 그가 자유로워질 것 같았다.  


나는 아직도 B가 가끔 궁금하다. 아주 많이.  

잘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 아주 많이.  

그리고 어느 날 불쑥 전화 주었으면 좋겠다.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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