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만난지 갓 두달정도 됐을 때, 함께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했었다. 눈이 깊게 쌓인 추운 날이었다. 화려한 웨딩홀에서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을 축하했고, 식사 후 우리는 외투를 팔에 걸치고 엘레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남편이 말했다.
"난 결혼할 생각이 없어"
전에도 비혼주의라는 말을 듣긴 했었는데.. 만난지 두달된 여자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누가 결혼하쟀나? 그 땐 별로 정도 없었을 때고, 하필 결혼식 가기 전날부터 지금은 예뻐하는 마음으로 보듬어주며 살고 있는 남편의 미운 모습(계획대로 풀리지 않으면 예민해지는)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터라 더욱 곱게 보이지 않았다.
"아 그래? 나는 결혼 하긴 할건데."
내면에 어이없음 + 약간의 분노가 드러나지 않도록 "아 그래?"로 말을 시작하면서 별거 아니라는 연예인 뉴스 얘기하듯이 답했다.
"누구랑?"
"몰라? 나중에 다른사람이랑 하겠지 뭐"
여기서 남편이 약간 억울 + 분해하길래 덧붙였다.
"오빠는 결혼 생각 없다며, 근데 나는 나중에라도 결혼할 생각은 있거든. 그니까 하게 되면 오빠 말고 다른사람이겠지 (미소)" 즉, 나의 선택은 너의 선택을 근거로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줬다.
지금에서야 알게된건데 남편은 이런 화법에 매우 약하다. 인문계 학자인 남편은 스스로를 논리로 똘똘 뭉친 토론의 달인으로 여기며 살아왔고, 남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한방이 언제나 먹혔다고한다. 그런데 가끔은 코너에 몰렸거나 불만이 쌓였을 땐 아내인 날 향해 이런 공격을 날린다.
그럴 때 내가 그 논리를 역이용하거나 논리의 결함을 짚으면 잠깐의 반발 후 자기 생각이 틀렸음을 얼른 인정한다. 그게 내가 좋은 많은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날 말로 이긴 여잔 니가 처음이야"
엘레베이터를 나가 주차장까지 걸으며 약간의 서늘한 침묵이 있었지만 금방 화제는 전환됐고 그 날 하루는 특별한 일 없이 지나갔다.
그로부터 6개월 후, 바뀐건 계절 그리고 비혼주의를 주창하던 이 남자의 혼인상태였다.
더운 여름, 코로나가 심각해지면서 나는 100% 재택근무를 시작했고, 내 첫 차를 구매한 후 운전의 재미를 알아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그 전엔 주말에만 만났다면, 이제는 평일에도 거의 1주일 내내 만나고 있었다.
남편은 약 4평짜리 독신자 숙소에 살고 있었는데, 언제나 깨끗했고 중앙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왔다. 우리집은 방과 거실이 분리된 10평 원룸으로, 훨씬 크고 예쁘게 꾸며놨었지만 고양이 털이 입에 들어가기 일쑤고, 가끔은 바닥의 마른 밥풀이 압정처럼 발을 찌르는 곳이었다. 더위를 많이 타는 내가 틴팅도 약했던 진회색 스파크를 타고 동부간선을 달려 도착한 뒤 남편 숙소 문을 열면 불어오는 18도 에어컨 바람에 나는 "이게 호텔이다"라고 외쳤다. 남편이 우유에 말아주는 오레오오즈는 웰컴 스낵이었다.
남편 직장에서는 기혼자들에게 24평 아파트를 빌려주는데, 여기로 이사한 동기가 남편을 집들이에 초대했다. 구체적으로 결혼에 대해선 얘기한 적이 없지만, "난 결혼할 생각이 없어"에서 "같이 살면 좋겠다"까지 발전한 사이였기 때문에 내심 궁금해 사진을 많이 찍어오라며 보냈다. 그랬더니 집주인이 허락했다고 그 집 수건걸이까지 찍어온 남편은 아파트가 얼마나 아늑하고 사이즈에 비해 넓어보이는지 평면도를 그릴 수 있을 만큼 설명해줬다.
그 날, 남편은 "우리 혼인신고하고 여기가서 살까?"라고 제안했고, 바로 다음날 우리는 혼인신고했다. 이 빠른 전개가 낯설 수 있지만, 우리는 실제로 바로 다음날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했다.
부모님께는 그 후 말씀드렸고, 그 주말에 각자 부모님을 뵈러 갔다. 친구들에게 여기까지 말하면 다들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사실 우리 부모님들이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축하해!"였다. 남편과 나는 둘 다 외동이고, 어릴때부터 외국에서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우리가 자신있게 결정하면, 부모님은 신뢰해주고 지지해오셨다. 그래서 "혼인신고했어요!"라고 얘기해도, "우리 딸, 아들이 알아서 잘 선택했겠지"하는 마음으로 오직 축하해주셨다.
먼저 남편의 부모님을 봬러 갔었는데, 아버님 어머님 처음 뵙자마자 눈물이 났다. 눈물이 울컥 나서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 적은 처음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미 날 사랑하고 계시다는게 바로 느껴져서 그랬던 것 같다. 그래놓고 너무 쑥쓰러워서 말은 많이 못하고 모든 반찬을 내 앞으로 밀어주셔서 그저 열심히 먹었다.
그 다음엔 우리 엄마를 보러갔는데,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날이었다. 생각보다 보수적인 우리 엄마라서 남편의 셔츠에, 바지에, 신발까지 새로 사입히고 출발했다. 도착했을 때 엄마는 보자마자 딱 두마디 했던 것 같다.
"연예인같다!"
"얼굴이 와이리 작노!"
신경성 변비가 와서 갑자기 치질약까지 찾아야했던 남편과는 달리 우리 엄마는 내가 대학 합격했을 때 이후로 가장 기뻤던 것 같다. 남편에게 이런 저런 질문들을 하고 대화를 해보더니, 내가 옷 갈아입을 때 엄마가 불쑥 들어와서는 말했다.
"야, 니 혼인신고 잘했다."
그 후 지금까지도 "우리 사우"는 엄마의 최대 자랑거리가 됐다.
지금은 결혼 생활을 누구보다 즐기고, 주변에 결혼을 추천하는 남편에게 "그래서, 비혼주의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남편의 설명은 이랬다. 훌륭한 학자가 되는게 목표였던 과거의 자신은 가정에 소홀하거나 가정이 파괴된 주변의 학자들을 보며 "결혼은 미친짓이야" 생각했고, 역시 연구만 하다가 일찍 세상을 뜨겠노라고 다짐했다고 했다. 그러다 내가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그 때부터 바뀌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남편이 얼마나 사랑이 많은지, 사랑을 주는 것, 그리고 받는 것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잘 알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혼주의이던 사람이 바뀐게 아니라, 비혼주의라는 이름의 자기 방어를 내려놓았다고 생각한다. 남편은 어린 시절 10번 가까이 이사를 다니고, 10년동안 혼자 미국에 살면서도 여러번 옮겨다니면서 사람과의 깊은 애착이나 유대를 형성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30대가 되었고, 앞으로도 정착할 계획이 없는데, 정착할 수 있을까? 결혼해서 잘 살 수 있을까?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의문을 "못하는게 아니라, 안하는거야"로 포장했던 것 같다.
이제 남편은 나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한다. 여전히 훌륭한 학자가 되고 싶지만 그게 우리의 행복을 방해한다면 포기하겠다고 한다. 가끔 연구를 게을리하는 남편을 보면 우리 행복에 너무 큰 무게를 실은 것인가 살짝 걱정도 되지만 문제는 없다. 자본주의의 선봉엔 내가 설테니, 남편은 배부른 학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