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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마녀로서의 내가 살아가는 법

by 몽도리

내가 마녀라고 하면 사람들은 나보고 주술이나 저주 같은 것도 하냐고 묻곤 한다. 답부터 얘기하자면, 때에 따라 다르다. 주술은 항상 저주처럼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기 위한 것만 하는 게 아니다. 대부분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내 번영을 위한 간단한 의식이다. 예를 들어 손바닥에 켈틱 기호를 적어놓는다는 가 아니면 바질이나 소금을 넣고 원하는 걸 적어서 하얀 양초에 태우던가. 정말 저주를 하고 싶을 때는 그 사람의 이름을 세 번 적고 마늘이나 후추를 섞은 물에 넣고 다음 날 태우면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이 나에게 끼치는 해가 적어진다고 나는 믿는다. 이런 과정을 하고 나면 내면은 고요해진다. 감정의 여과를 도와준다고 해야 하나. 일종의 해방감이다. 그리고 타인에게 직접적으로 분노를 퍼붓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기도 하다.

화나거나 우울한 일들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계속 생긴다.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때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다. 그냥 머물면 힘든 사람, 아픈 사람, 화난 사람에 머물게 된다. 어떻게 승화시키느냐가 중요한데 나는 이를 종교로 해결한다. 내가 믿는 신과 의식적인 행동, 내가 산 관련된 액세서리, 옷 등을 입고 고스족 화장을 한다. 검은 계열의 립스틱을 바르고, 손톱을 검게 물들이고 최대한 창백한 화장을 하며 두려운 게 없는 상태가 된 채로 등교를 할 때가 있다. 그때 타인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신경 쓰지 않는 내 모습이 썩 마음에 든다. 성인이 되고 나서 좋은 건 내 가치관을 내가 스스로 정립하는데 방해물이 없다는 것이다.

부모의 가스라이팅으로부터 벗어날 만한 판단력, 가스라이팅을 유발한 폭력적인 사회구도, 대학에서도 느껴지는 차별, 부조리함, 등을 똑바로 눈뜨고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거기서 발생되는 분노는 건강한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나일 때 가장 자유롭다는 걸 느낀다. 고스족 마녀로 살아간다는 건 쉽지 않다. 우선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졸업하고 나서 종교활동을 하라는 말을 지키는 척을 하기 위해 몰래 해야만 하고 숨겨야 한다. 하지만 나는 내 정체성을 감추고는 살지 못한다. 최근 대중문화 수업을 들으면서 나의 고스족 면모가 하위문화에 해당하며 이에 대해 즉, 자신의 취향을 부르뒤에 의 개념과 연결 지어 서술하라는 에세이 과제를 받았다. 난 그 양반의 개념이 못 마땅하다. 내가 향유하는 문화와 상극의 성향이다.

결국 연결은 못 시키고 내 고스적 취향을 가지고 반박만 해댄 과제가 탄생했다. 누군가가 권력을 가지고 상위, 하위, 주류, 비주류를 나눌 수 있다는 게 불공평하다. 죽은 위인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지들이 뭔데 감히 개개인의 취향에 대해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사람들은 내가 이런 종교를 믿는 걸 부모님도 아시냐고 묻는다. 나는 22살이어서 설명할 필요나 의무는 없지만 답하자면 허락은 받은 셈이다. 허락 없어도 내 맘대로 할 거지만. 나는 자립의 중간에 다다랐다. 취업을 해야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종교적으로 부모에게서 자립할 수 있다. 경주마 같이 앞만 보고 달리는 흔한 사회의 양상에 편승하고 싶지 않지만 그게 미래 내 자유와 관련된 것이라면 희생해야지.

나는 다수가 쫓는 것에 부화뇌동하는 사람들 즉, mass가 되고 싶지 않다. 주체적인 대중인 popular가 되고 싶을 뿐이다. mass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렇게 프레임을 씌워서 타인이 좋아해서 나도 좋아하게 된 생각 없는 집단이라고 대중을 폄하하는 단어를 만들었다. 꼭 인간은 이분법적인 사고를 만들어야만 속이 시원할까. 세상을 흑백논리로 보기 위해 부정적인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층위를 나누고 싶어 하는 권력추구자들이 싫을 뿐이다. 그들을 위한 마늘과 후추, 바질 한 스푼씩, 내일이면 함께 양초에 태워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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