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간의대지 Oct 24. 2021

검진 (3)

짧은 이야기

또 잠에서 깼다. 제대로 잠이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힐끗 넘겨본 시계는 4시 23분을 가리키고 있다. 이제 시간이 가기를 바라는 것은 포기했다. 나는 피곤한 상태로 내일 의사에게 정밀 검사 결과를 듣게 될 것이었다. 자고 있는 채로 듣는 게 아닌 이상은 사실 잠을 별로 못 잔 상태로 의사에게 검사 결과를 듣는 것과 아주 푹 잔 상태로 듣는 것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 지금 병실 침대에 누워서 잠들기를 기다리는 나의 몸 안에는 결과가 이미 들어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를 관측한 사진이 이미 병원 시스템 안에 저장되어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의사가 검사 결과를 보고 초진에서 의심한 것처럼 세력을 잔뜩 넓힌 암세포라면 이미 말기까지 진행된 상태일 것이다. 무섭게도 그때는 이미 많이 늦어버린 거겠지. 그러고 나면 그 사실을 엄마와 아빠에게 알리고 또 그 상태를 결국 받아들이기 위해 이런저런 희망적인 생각들을 동원하겠지. 그것은 길고, 반드시 생각보다 힘든 과정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게 아니라면 내게 아무런 문제도 없다면 몇 시간 잠을 못 자는 것 정도야 우스운 일이 된다. 이미 내 몸 안에 있는 것으로 인해 나는 따라야 할 것이다.

만약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어떤 사람들은 그동안 하지 못했던 자기 삶을 마지막까지 찾아 나설 것이고 동시에 어떤 사람들은 그저 참고 있던 분노 같은 것을 방사할 것이다. 멸망이든 멸망과 비슷한 것이든 태도를 양극화시킬 것 같았다. 그리고 내 것이 어떤 것일지 확인할 시간이 곧 다가오고 있었다. 


***


마지막 장은 빛의 탑에 있는 12 원로와 함께 무한의 심장부를 지키고 있는 대주교와 슈 로드의 대화로 끝낼 생각이다. 앞에서 술회했듯이, 이 결말부에 따라, 주인공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시놉시스 형식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시놉시스를 마치고 나면 이제 그가 깨어날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면 그가 슈 로드의 상태를 볼 수도 있겠지. 마지막 대주교의 대사는 이러하다. 


“슈 로드여 나는 그대를 온전히 알고 있다. 그대는 우리 제국이 숭배하는 빛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어차피 그대는 그대로서는 가늠해볼 수 없는 큰 섭리대로 패배할 것임을 먼저 일러두겠네. 자네는 곧 죽음을 선고받는다네. 자네는 혁명이 성공할 만한 가치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낮은 가능성에도 걸어보았을 것이지만. 미안하지만 그런 가능성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네. 혁명이 자유를 가져다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왔겠지.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것을 동지들에게 다독여왔겠지. 그것이 리더의 숙명이니까. 또한 우리가 허상의 적을 상정해두고 모두를 고문하면서 지배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오 아니야, 아닐세, 자네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이 세계는 아주 작은 고생이라도 감수할 가치가 있는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네. 하물며 단 한 명이라도 죽는다면 반드시 실패할 혁명이 그 앞당긴 죽음을 어떻게 책임을 질 셈인가. 우리는 전혀 신앙을 가지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우리 의지로 할 수 있다고 믿는 것들이 이미 모두 신의 뜻이란 말일세. 진실에 대해서 알려주도록 하지. 우리가 숭배하는 자비롭고 완전한 신 그것은 없다고 솔직히 고백하네. 그렇지만 자네가 발견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신의 부재 또한 진실이 아닐세. 진실은 그 사이에 있다네. 세계에는 신이 있다네. 다른 세계가 있다면 오직 우리 세계에 한정해서 말하는 것이지. 우리 세계의 신은 우리의 조물주로서 우리를 만들고 이 세계를 만들고 그것이 정지하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도록 만들었다네. 그런데 어떤 식으로 만들었는지가 중요하지. 어쩌면 자네가 시작한 이 혁명에 대해서 말하는 게 같은 대답이 될 수도 있겠군. 나는 혁명의 멋진 부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 밀알이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러나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명언 말일세. 그렇지만 그건 결정되어 있지 않은 가능성의 세계의 이야기일세. 우리 세계는… 잘 듣게. 우리 세계의 신은 우리 세계 자체와 완전히 동일한 존재라네. 우리가 신의 모사라고 표현해 놓은 건 일종의 수사적인 표현이지. 우리에게도 진통제 같은 것이 필요하니까. 정확히는 우리의 집합인 이 세계가 곧 한 개체의 신이라는 걸세. 그러니까 이 세계에 오로지 태초의 인간 하나만 있었을 때 그 인간은 곧 신이었지. 한 개체가 모든 집합이던 순간 말일세. 그리고 태초의 인간은 세계의 설계도에 따라 이 세계를 만든 것일세. 그가 왜 그런 일을 했느냐면 그도 설계도에 따라 나온 존재이기 때문일세. 태초의 인간으로부터, 과거로부터 우리는 계속해서 증식했지. 우리가 증식할수록 세계는, 즉 신은 거대해졌네. 그러니 우리 각자의 눈으로는 신을 한 개체로서 조망해 볼 수가 없게 된 것일세. 자네가 그토록 간절한 자유가 없어 억울한 우리의 일생을 생각해보게. 우리는 분열하고 성장하고 일하고 죽고 그 시체가 녹여져 또 다른 분열의 에너지가 되지.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말할 수 없다네. 불합리란 합리를 그릴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란 말일세. 우리의 존재 이유는 무언가 그럴듯한 게 아니라네. 우리는 사실 신을 가지고, 숭배할 수 없는 것들이라네. 우리 자신의 총체가 신이기 때문에. 이 세계의 목적은 이 세계 자체의 유지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진실이란 말일세. 날 것 그대로 세계의 설계도를 자네에게 보여줄 수도 있네. 우리 모두의 생명 시계도 갖고 있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다면 말이지. 신이 어딘가로 갈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는 올 수가 없다네. 우리가 그를 숭배할 수 없듯이 그도 우리에게 관심을 가질 수 없다네.”

 

빛의 탑 꼭대기에서 슈 로드에게 말한 대주교의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슈 로드에게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대치하던 혁명군과 빛의 군대/붉은 군대 연합군 무리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거대한 빛을 보았다. 그들은 들어 본적도 없이 이것이 신의 약속과 관련된 체험일 것이라고 알아챘다.  피아를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밝은 광명이 순식간에 전방위로 쏟아졌다. 색채와 경계가 일순간 모든 것을 양보했다. 이념을 본뜬 옷과 누구의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같은 피의 색조차 모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러났다. 어둠이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이 빛의 다리를 건너 수백수천의 빛의 존재들이 내려왔다. 

 

우리가 이겼어! 슈 로드가 12 원로를 처치한 모양이야. 신께서 자유를 갈망한 우리의 방황에 응하여 천사를 보내셨다! “ 

 

쏟아지는 빛 속에서도 가장 눈이 밝은 혁명군의 일원이 다소 수사적으로 외치자. 넝마로 살아남은 혁명군들이 그제야 어색하게 호방하게 웃으며 서로 얼싸안았다.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혁명군도 있었다. 


눈을 감아도 모든 열린 곳을 향해 빛이 들어왔다. 마치 몸 안에 있는 모든 어둠의 해감을 뱉어내도록 하는 것처럼. 그들이 웃는 동안에 그들의 가슴으로부터 떨림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까지 견뎌온 핍박과 상처와 피가 모두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마침내 자유에 대한 그들의 갈망이 일순간에 채워지는 듯했다. 천사들이 혁명군과 붉은 군대 너나 할 것 없이 거대한 춤을 추었다. 그리고 춤사위가 격렬해질수록 웃음소리가 없어지고 형체가 없어지고 넋이 사라지고, 구분이 없어지고, 모두 작동을 멈추고, 죽어 없어져, 빛이 되었다. 슈 로드는 그 빛이 무한의 심장부의 동력 신경계로 날아오는 것을 보며 빛 속으로 눈을 감았다. 


***


허무하게도, 그날 불면의 밤을 보내고 난 아침에 나는 의사로부터 싱거운 진단을 들었다. 위암은 오진이었다는 것이다. 의사는 초진 검사에서 위의 상층부에서 암세포 군락으로 추정되는 것을 보았지만 정밀 검사에서 보니 혈관의 세포 찌꺼기가 빨리 치워지지 않아서 생긴 무해한 일종의 멍일 뿐이었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인데. 그런데 오진이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니. [끝]


작가의 이전글 검진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