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나는 어쩌면 내가 원하는 일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욕구를 갖고 있지 않나. 하지만 실제로 자기의 진로를 찾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사실 중고등학교 때 본인의 진로와 진학에 관해 심도 있게 고민하는 청소년들은 많이 없다. 나도 학창 시절에는 대학교를 가는 게 목표였을 뿐 ‘어떤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혹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하기 위해서는 어떤 길을 가야 할까’라는 구체적인 목표나 방법을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막연히 대학에 들어가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다거나 하고 싶은 일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수시 원서를 접수하면서 나는 갑자기 간호학과를 지원하였다. 대학 지원을 위해 개설 전공 리스트를 쭉 살펴보는 데 정말 가고 싶은 과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이과였는데 수학은 너무 싫었고 그렇다고 공대를 가기에는 물리가 너무 싫었다. 순수 과학을 전공하면 졸업 후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았고 너무 공부를 오래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문과로 교차 지원하기에는 뚜렷이 재미있어 보이는 전공이 없었다. 그래서 적정선으로 찾은 과가 바로 간호학과였다. 문이과 학생들이 모두 지원하는. 의료 쪽은 문외한이었지만 그래서였는지 뭔가 멋있고 재미있어 보였다. 나는 사실 예술 쪽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실력도 환경도 뒷받침해주지 못했으니 일단 서울로 대학을 가야겠다는 마음만 굳건한 상태였다. 내가 들어가고 싶었던 문화 사역 단체가 서울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에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면 일단 단체 활동을 시작해야지 라는 생각만 가지고 깊은 고민은 하지 않은 채로 간호학과로 5개 수시카드를 넣었다. 그리고 선교에도 관심이 있었으니 간호학을 공부해 두고 자격증을 딴다면 후에 의료 선교를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어딘가에 쓸데가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지원했던 간호학과에 덜컥 합격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서울로 대학을 진학해서 1학년에 입학했던 나는 대학에 들어가면 더 이상 공부는 안 해야지 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간호학과 학생에게 이런 생각은 통하지 않았다. 무려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그러니까 대학교에서의 첫 시험에서부터 밤을 새워 공부하는 동기들에겐. 도서관에서 밤을 새우고 앞다투어 자리를 맡는 동기들을 보고선 ‘아.. 나는 공부하기 싫은데..’라는 생각만 했다. 그럭저럭 1학년을 마치고 나서는 겨울 방학을 언니가 있던 캐나다로 보내기로 하였다. 그 계획이 충동적으로 캐나다에서 살아보자라는 마음으로 바뀌어 1년 휴학계를 냈다. 캐나다에서 영어도 배우고 불어도 배우고 여행도 하다가 2학년으로 복학해야지라는 생각으로. 하지만 모든 것은 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캐나다에서 할 게 없어서 6개월 만에 귀국한 나는 2학기로 복학을 하려고 했지만 학교 측에서 간호학과 특성상 1년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기에 2학기로 복학해도 들을 만한 수업이 없어 내년에 돌아오라고 했다. 옳다구나. 그럼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문화 사역, 뮤지컬 등등을 제대로 한번 경험해 볼까. 그렇게 꿈에 그리던 문화 사역 단체에 들어간 나는 2년간 풀타임으로 활동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간호학과는 자퇴를 하게 되었다.
2년의 시간 동안 연습실로 출퇴근하고 방방곡곡으로 사역을 다니면서 너무 행복했다. 재미있었다. 계속 그렇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사역을 멈춰야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다시 공부를 하려고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진짜 내가 원하던 예술 쪽으로 진학을 해봐야겠다’라는 마음과 함께. 어렸을 때부터 해외 생활에 익숙했던 나는 한국에서만 가고 싶은 학교를 찾는 게 아니라 시야를 넗혀 해외 여러 대학들도 알아보기 시작했고 어쩌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크리스천 신앙을 베이스로 둔 예술 교육을 제공하는 대학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의 생활은 나에겐 큰 도전이었다. 영어로 연기를 하는 것도 처음이었고 혼자 살아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수업은 소규모로 진행되어서 디스커션 점수가 중요했는데 한국인이 나 혼자밖에 없어서 원어민들 사이에서 입을 벙긋하지도 못하고 수업이 끝나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 아닌가.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친구들도 사귀고 교수님과도 친해졌다. 졸업할 당시 학과 자체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었다. 하고 싶었던 일들을 원 없이 하면서 이제 나도 공연을 하는 사람으로 내 나머지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겠다 어렴풋이 꿈꿨던 시간이었다.
그렇게 귀국을 하고 난 뒤 한국에서도 공연 관련 일을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코로나라는 것이 찾아왔다.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단연코 공연 업종이었다. 그렇기에 신규 직원을 채용하는 곳은 없었고 한국에 발이 묶여 버렸다. 진로를 고민하던 중에 결국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버티지 못하고 일반 회사 마케팅 부서로 취업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시간이 흘러갔고 5년의 시간 동안 4번의 이직을 감행했다. 원래 하고 싶었던 일이 아니었으니 뭐 하나 마음에 안 들면 쉽게 이직을 했던 것 같다. 혹자는 그렇게 이직을 성공적으로 하는 것도 능력이라지만 사실 나는 회피하는 성향이 있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이직할 때마다 조금 더 좋은 환경의 좋은 회사로 이직을 했기에 마지막 회사는 정말 만족스러운 조건과 꿈꾸던 곳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럼 지금도 마케터로 일하고 있냐고? 답은 NO.
이제 진짜 돌아 돌아 내가 좋아하는 일 +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건 바로 초등교사. 뉴질랜드 이민. 한국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다는 것은 사실 생각하기도 싫다. 아이들이 좋다고 해도 학부모 민원을 견디기 힘들 것 같아 일찌감치 포기했다. 하지만 뉴질랜드라면 말이 달라진다. 세계 최고의 교육 시스템을 갖고 있는 곳에서 선생님으로 살아간다니. 아이들과 함께 대자연 속에서 뛰놀면서. 그래서 나는 이민을 가기로 하였다. 뉴질랜드로.
이 마음은 코로나가 거의 끝날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회를 찾고 있던 와중에 누군가 소개해 준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예전부터 생각해 오던 차세대 교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유치부 선생님으로 매주 아이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근데 여기 차세대 사역은 뭔가 달랐다. 아이들은 똑같을 수 있는데 전도사님들이 달랐다. 너무 아이들에 진심이었다. 굳이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온 마음과 시간과 정성을 쏟아부었고 그래서인지 다른 교회들에 비해 아이들 출석 인원이 많은 것 같았다. 거의 매주 연극으로 설교를 구성하셨고 교회에서 무슨 행사가 있을라치면 토요일 하루종일 고민해서 공간을 꾸몄다. 아이들을 위해 따로 찬양 영상을 촬영하고 코로나로 인해 인원 제한이 있었을 당시에는 온라인 예배에서 동물옷을 입어가며 아이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그 모습들을 옆에서 지켜보며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아 이렇게 일하는 사람들도 있구나. 자기의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일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렇게 일하는 게 너무 행복한 사람들이 있구나. 나도 그렇게 일하고 싶다.'
그전까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따로 돈 버는 일은 그냥 필요해서 하는 것.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적당히 워라밸 지키고 퇴근하고 나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이 어쩌면 당연한 어른의 삶이라고 나 자신을 합리화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공연, 무대, 연극은 피치 못하게 할 수 없는 상횡이 되어버렸으니 그냥저냥 내 능력치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공연이나 보러 다녀야지 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만났던 전도사님들은 달랐다. 자기가 하는 일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고 그래서 더 열심을 가지고 마음을 담아서 고민하며 살아갈 때 그 진심이 아이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 수도 있구나를 깨달았다. 유치부 사역을 하면서 전도사님들한테만 충격을 받은 건 아니었다. 내가 매주 만나는 5-6세 어린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별거한 게 없었는데 1주일 사이에 울고 불며 엄마를 찾던 아이가 씩씩하게 걸어 들어온다. 예배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딴짓하던 아이가 어느새 갑자기 설교에 빠져든다. 장난치느라 하나도 안 듣는 줄 알았는데 내 얘기를 기억하고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과 달랐다. 어른들의 상식이 통하지 않았고 그들만의 방식과 방법대로 살아내고 있었다. 그 매력에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빨려 들어갔다.
그때부터였다. ‘아 나도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을 하고 싶다.’ 그렇게 결국 나는 뉴질랜드로 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