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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민재 Mar 04. 2022

내향인 분투기


내향적인 사람은 얼마간의 분투기를 겪는다. 그도 그럴게 세상을 보아하니 인상 좋고 사람 좋고 친화력 좋은 사람이 인기가 많은 듯한데 나는 태생부터 그쪽 과는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엔 그 맛이 너무 씁쓸하기 때문이다. 부정도 했다가 체념도 했다가 합리화도 했다가 결국엔 두 손 두발 다 들고 내 타고난 내향성에 백기까지 드는 걸로 분투기가 끝나는 것이다.



내가 소심하다거나 혼자 있길 좋아한다거나 불편한 사람과 있는 건 정말 최선을 다해서라도 피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들켜서 좋을 것 없어 보인다. 그래서 그건 일급비밀이다. 이미 눈치채 버린 사람에게야 어쩔 수 없지만 입학, 입사, 친구를 소개받는 자리 같이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과 마주할 일은 드물지 않은 기회이니까.



요즘은 또 달라진 것 같긴 하다만 그래도 여전히 내향적인 사람에게는 몇 마디의 변명이 쫌 필요하다.

' 아니, 내가 소심하긴 한데 그렇다고 막 할 말 못 하고 그런 답답한 사람은 아니야...'

'아니, 내가 혼자 있는 걸 좋아하긴 하는데 그렇다고 널 만나는 이 약속이 아주 힘 빠지는 일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야...'

(나의 경우에는 보통) '아니, 내가 되게 내향적이긴 한데 그렇다고 그렇게 재미없는 사람은 아니야...'



변명을 단다 해도 스스로 내향적임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래도 나쁘지 않다. 나는 그보다도 더 멋없던 시절이 있었는데, 외향적이려고 부단히 애를 쓰던 때이다. 약속을 자주 잡고 연락을 잘하고 신나게 잘 놀고 뭐 그런 것들이다. 그게 뭔 노력이냐 싶기도 하지만 저 문장들에 '누구와도'를 붙이면 나 같은 사람들에겐 벌써 머리가 아찔해지는 일인 것이다.



내가 아닌 사람인 체하는 모습이 얼마나 체한 움직임을 내어내는지 당시엔 알 길이 없다. '누구와도' 그런 시간을 보내다 말 그대로 혼이 빨려서 집에 돌아온다. 마침내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벗어내면 아침보다 몸이 더 허해져 있다. 그래도 보이는 건 약과다. 보이지 않는 곳에 쌓인 내 것이 아닌 것들은 벗어낼 수도 없으니.



언젠가 이런 글을 읽었다. '장애인 차별, 여성 차별, 노인 차별처럼 대부분의 사회는 내향적인 사람이 도무지 성공하기 힘든 내향인 차별이 있다.' 비약이 있는 주장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고, 한 번도 정치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은 가장 개인적인 성품의 문제를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는 접근법에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일면 고개를 끄덕이게 하기도 한다. 우리가 소심한 성격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알바나 회사에서 커뮤니케이션, 서비스 정신 같은 소위 외향적 기질을 중요하게 제시하곤 하니 말이다. 앞선 우스겟 소리처럼 내향인이 변명을 하게 되는 이유도 이런 문화 때문일 테지.



각자 자신의 내향성에 백기를 들게 되는 계기는 다를 테다. 나의 것은 이렇다. 아무리 다른 사람인 체해봐도 도무지 그 사람이 되지를 않아서 결국 포기를 했다. 그리곤 어떤 주제에서든 과거보다 현재 버전의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하는 집요한 습관을 꺼냈다. 나한텐 이게 쫌 쓸만한 자기 암시법이다. 그래서 외향적이기를, 미국식으로는 '피플-펄슨'이기를 인생에서 단호히 포기해버린 나를 더 괜찮은 사람으로 지겹게 상상했다. 거기서 나는 더 솔직하고 겸허한, 그리고 조금 까칠한 느낌의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음, 얼마 안 가 그 사람이 또 매력적이여 보이게 돼버린 것이다. 여기서 또 성격이 나온다. 역시 내향인의 진수는 혼자 생각하는 시간에 있는 것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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