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에 대한 잡상雜想
글이라고 한 달에 한두 번 브런치에 쓰는 것이 고작이지만, 남들에게 공개적으로 보이는 것이기에 나름대로는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에도 정성을 기울인다. 맞춤법에 어긋나지 않는지, 틀린 표현이나 어법은 없는지 애매한 것은 사전을 찾아보고 그동안 스크랩해 놓은 ‘우리말 바루기’ 같은 칼럼들도 참고한다. 그런데도 나중에 다시 읽어 보면 비문(비문이라는 걸 인지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이거나 어색한 표현이 눈에 거슬려서 고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글뿐만 아니라 말에 대한 생각도 가끔 하게 되어 브런치에서도 두세 번 이에 대한(별 대단할 것도 없는) 생각을 쓰기도 했다. 요 며칠 사이에도 이곳저곳 신문이나 방송에서 읽고 들은 내용을 토대로 (또) 다시 말과 글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다.
얼마 전 도올 김용옥 선생이 유튜브 강의(『주역』 「계사전」) 서두에 하신 말씀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우리나라 사람은 오랜만에 누군가를 만났을 때 상대방의 외모에 대한 말로 인사를 시작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를테면 ‘어려 보인다, 예뻐졌다’는 덕담 같은 말부터, 왜 그리 늙었느냐, 안색이 좋지 않은데 어디 아픈가, 초췌해진 것 같다, 살찐 것 같다, 말라 보인다’ 등등인데 이 같은 외모에 대한 멘트를 그 사람에 대한 관심 표명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의 인상에 대한 언급은 보는 사람이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 역시 그런 말들을 습관처럼 써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나 자신이 남들로부터 그런 인사를 받을 때는 떨떠름한 기분이면서도 나는 남들에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써왔다는 사실이다. 작년 가을 집안 어른이 타계했을 때 장례식장에서 아주 오랜만에 만난 종친 한 분이 내게 던진 말이 떠오른다. 나보다 10여 년이나 연배가 있는 분이고 항렬이 내 증조부 뻘에 해당하는 분인데 나를 보고 하는 첫 말씀이 “니는 꼴이 왜 그러노? 어릴 때는 이쁘장하더니만” 하시는 게 아닌가.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을 만큼 불쾌한 느낌이었다. 이번에 김용옥 선생의 말을 듣고 앞으로는 절대 남의 용모에 관한 말을 인사로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영산대 이우석 교수가 신문에 쓴 한글세대의 문해력 추락에 대한 우려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나 같이 고등학교에서 한문 교육을 받은 세대도 한글로 표기한 한자어에 대한 이해가 곤란한 경우가 많은데, 한자어를 한글로만 표기하는 한글 전용 정책에 따라 한문 교육을 받지 않은 한글세대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이 교수가 예를 든 단어 몇 개를 보자. 혼숙(混宿)을 혼자 숙박으로, 우천시(雨天時)를 도시 이름으로, 전임자專任者를 前任者로 오해하고, 다문화多文化센터를 茶(전통차)문화센터로, 위증교사僞證敎唆를 僞證敎師(위증을 가르치는 교사)로 이해하는 것 같은 사례다. ‘이러한 오해와 소통 부재는 한글전용정책에 따라 한자어를 한글로만 표기하도록 규정한 데에 기인’하는 것이다. 학교에서의 한문 교육은 1970년 이후 교과서에서 잠시 사라졌다가 1975년부터 괄호 안에 보조적으로 병기倂記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한국어 단어의 70%가 한자로 구성된 한자어이고 특히 법령과 의학 용어 등은 한자로 된 전문용어가 많은데 학교에서의 ‘빈약한’ 한자 교육은 문해력 추락으로 직결되는 것이어서 이에 대한 대책은 ‘한자 교육이 답’이라는 말에 공감이 간다.
글뿐만 아니라 잘못 쓰는 말은 또 얼마나 많은가. 고두현 시인이 한 신문에 쓴 사례 몇 가지를 들어보자. 우선 경어법의 혼동에서 오는 것들인데, ‘제가 아시는 분’ ‘저에게 여쭤보세요’처럼 자신을 높이는 사례, ‘할머니를 데리고 가야 하는지 선생님께 물어봐라’ 같이 상대경어법에 어긋난 경우이다. 경어법에 주의하다 보니 ‘할머니가 귀를 잡수셨다’는 웃지 못할 표현도 등장한다. 잡수다는 먹다의 경어인데 귀를 먹다의 ‘먹다’를 음식물을 먹을 때의 먹다와 혼동한 데서 오는 결과다(이를 바르게 표현하면 ‘할머니가 귀를 먹으셨다’가 된다). 또 사람에게만 붙이는 높임말 ‘시’를 사물에 갖다 붙이는 사례는 “주문하신 커피 나오셨습니다” 제품 디자인이 너무 예쁘시죠?“ ”이 화장품은 피부에 정말 예쁘세요“ 같은 것들이다. 요즘 자주 듣는 말 가운데 ‘손님, 이쪽으로 가실게요’ ‘자 들어가실게요’ ‘대기실로 모일게요’ 같은 표현을 자주 듣는데(특히 병원에서) 들을 때마다 어색함을 느낀다. ‘칠칠하다(칠칠맞다)와 칠칠치 못하다(칠칠맞지 못하다)’의 혼동, ‘우연하다와 우연찮다'를 반대의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 등 단어의 뜻을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 잘못 쓰는 경우와 표기법이나 띄어쓰기가 틀리는 경우도 많다. 이런 사례들은 평소에 꾸준한 공부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익혀야 하는데 마음먹고 하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나 자신 명색이 어딘가에 글을 쓴다고 이런 방면의 책도 읽고 10여 년 전부터 ’우리말 바루기‘ 같은 신문 칼럼들을 스크랩해서 밑줄을 쳐가며 기록해 놓고 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잊어버리고 잘못된 표현을 습관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한자어에 대한 이해, 우리말 바루기에 대한 노력 못지않게 우리말의 아름다움에 대한 공부도 필요한 것 같다. 김수영 시인이 60년 전 쓴 수필에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를 들었는데 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근짜, 군것질, 총채, 글방, 서산대, 부싯돌, 벼룻돌이 그것들이다. 열 개 중 두 개는 나도 모르는 단어다. 각각의 말들에 대한 설명이 있었던 것 같은데 노트에 단어들만 적어 놓아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편 고종석 작가도 어느 책(『말들의 풍경』)에서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를 뽑은 적이 있는데 ‘가시내, 서리서리, 그리움, 저절로, 설레다. 짠하다, 아내, 가을, 넋, 술’이 그것들이다. 열 개 모두 어려운 말은 아니다. 뭐 이 말이 그렇게 아름다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나 말과 글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가진 분들이 고른 말들이라 곱씹어 되뇌다 보면 공감이 가기도 한다. 소설가 박상륭(작고)이나 김성동(작고), 김주영 선생 같은 분의 소설에 나오는 우리 옛말이 우리에게는 외국어처럼 낯설게 느껴지는데 사라진 우리말은 고사하고 지금 쓰는 말이라도 제대로 정확하게 써야 하겠다는 반성이 든다, 써 놓은 글을 읽어 보니 내 소견은 없고 남의 말만 잔뜩 늘어놓은 꼴이 되고 말았다. 이 또한 공부일 테니 하고 변명하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