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술을 잘 마시는 편이 아니다.
친구들과 마시면 늘 내가 먼저 취했고,
취하면 잠드는 게 내 주된 패턴이었다.
그런 나를 친구들이 그냥 둘 리 없었다.
항상 장난을 치고, 깨우고, 놀리며 밤을 이어갔다.
30대가 되면서부터 술에 쉽게 취하지 않는 법을 알게 됐다.
바로 한 잔을 꺾어 마시는 법이었다.
이렇게 하면 남들 두 잔 마실 때 나는 한잔을 마시게 된다.
물론 이런 나를 가만두지 않는 이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나는 빨리 취하고 내 몸도 힘들어
적당히 멈추는 법을 배운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이 되었다.
취하지 않지만 즐겁게 사람들과 마시기 위한 술이 되었다.
사실 나는 술을 좋아해서 마신다기보단,
사람이 좋고, 이야기하는 자리가 좋아서 마셨다.
맛있는 음식에 좋은 사람들, 거기에 술 한잔이 곁들여지면
그게 하나의 낙이라고 믿었다.
30대 중반 전까지 혼자 마시는 술은 늘 어색했다.
맥주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취하지 않을 술은 잘 마시지 않았다.
그렇다고 혼자 소주를 마시자니 왠지 초라해 보였다.
그랬던 내가, 서른 중반이 되어
퇴근 후 집에서 혼자 소주를 까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배달 음식 하나 시켜놓고,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틀어놓은 채로 홀로 마시는 술이 그렇게 맛있을 줄 몰랐다.
술도 소주나 맥주가 아닌 와인, 막걸리 혹은 그 외에 다양한 술을 마실 수 있으니
다양한 종류의 술을 돈도 덜 들고, 집으로 돌아갈 걱정도 없고,
내가 조절해서 기분 좋을 만큼만 마시다 잠들 수 있었다.
혼자 마시는 술은, 외로움이 아니라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 되어 있었다.
결혼 후 아내가 해주는 음식에 술을 곁들이며,
‘이게 진짜 행복이구나’ 싶던 때도 있었다.
그러다 아이가 태어나고,
육퇴 후 아내는 피곤하다고 먼저 잠들고,
나는 홀로 야식과 함께 술을 마셨다.
사실 하루 종일 일하고 집에 들어와서
아이와 놀아줘야 하는데 만약 집에 와서
아이가 자고 있다면 그건 참 땡큐였다.
아내까지 잠이 든다면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나는 그 시간을 즐겼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술을 마시는 횟수는 늘었다.
어쩌면 육아를 조금은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퇴근하고 와서 쉬고 싶은데 아이들과 놀아주기가
참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퇴근 후 딱히 할 게 없으니
스트레스를 술로 풀게 되었고
계속 약속을 만들어 술을 마시게 되거나,
약속이 없으면 집에서 혼술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규칙은 있다.
'술을 마신 다음 날은 절대 마시지 않는다.'
그게 나름의 선이었다. (그 와중에 간을 지키기 위해...)
그런 선을 정하더라도 일주일에
3번을 마시게 되었고, 내 몸에게 죄책감이 느껴졌다.
친구에게 죄책감을 이야기했을 때,
그는 웃으며 말했다.
겨우 세 번 가지고 그래? 난 일주일에 여덟 번 마신 적도 있어.
그 말이 위로인지 자랑인지 몰라도, 사실 위로가 좀 되긴 했다.
심지어 술을 마시기 위해 열심히 운동하는 친구들도 있다.
올해 초 다짐했다.
‘술을 줄여야겠다.’
그런데 이상하게 줄어들기는커녕 더 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약 5년 만에 축구를 하게 됐는데
경기 시작 5분 만에 발목을 심하게 접질렸다.
누군가 경합을 하던 것도 아니고
나 혼자 공을 잡으러 뛰어가다가 심하게 접질렸는 터라
너무 황당했다.
‘내 몸이 이제 예전 같지 않구나.’
예전엔 축구를 하면서 다친 적이 없었다.
축구장에서 나와 얼음찜질을 하고,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았다.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당분간 술은 자제하세요.
그 말을 들은 그날 저녁, 나는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그 주에 두 번 더 마셨다.
참 멍청한 짓이었지만, 습관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별일 아니겠거니 했지만 발목은 계속 불안했고,
계속 회복이 안되던 어느 날 문득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나는 술을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술 약속이 잡혀도 모두 거절했다.
장인어른과의 식사 자리에서도 “오늘은 안 마시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친구들은 비아냥거렸다.
야, 쫄보냐? 술 마시면 소독되니까 그냥 마셔~
그러나 나의 건강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
지금 치료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평생 고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술을 단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대신 그 시간에 운동을 했다.
아파트 커뮤니티 헬스장에서 30분 정도 근력 운동을 했다.
(하체 운동은 할 수 없으니 앉아서 하는 상체 운동만)
그리고 신기하게도 변화가 찾아왔다.
몸이 가벼워졌다.
술을 안 마시니 야식도 줄었고, 배가 들어갔다.
수면의 질도 좋아졌다.
예전엔 새벽에 꼭 한 번씩 깼는데,
요즘은 아침 알람이 울릴 때까지 쭉 잔다.
몸무게는 그대로인데
팔뚝과 가슴은 커지고, 배는 줄었다.
술이 없으니 약속이 줄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는 걸 좋아하는 나로선
이 부분은 좀 아쉽다.
그러나 건강이 우선이니 참아야 된다 싶었다.
사실 처음엔 발이 붓고 발목이 불편한 공포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아야 한다는 의지가 강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술을 마시기 가능한 20살부터
군대에 갔던 시기를 뺐을 때 약 20년간
한 달 동안 아예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 달 동안 금주하면서 금단현상처럼
술이 당겨서 미칠 것 같은 현상은 없었다.
한창 마실 때는 술이 딱 당길 때가 있었고
그날은 꼭 마셔야 했다.
그런데 2주 정도 금주를 하니 술 생각이 아예 나지 않았다.
그 대신 가족과의 시간이 늘어났다.
술을 안 마시니 아내가 제일 좋아한다.
며칠 전, 건강검진 문진표를 작성하며 스스로 놀랐다.
‘하루 10분 이상 건너요?’
생각해 보니, 점심시간을 빼면 거의 걷지 않았다.
‘과일이나 우유를 얼마나 섭취하나요?’
문득, 과일보단 탄산을, 우유보다 술을 마셔왔다는 걸 깨달았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지만,
몸은 숫자를 기억하는 듯하다.
20대엔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쪘고 건강했다.
30대가 피로가 쌓여 늘 피곤했다.
40대가 되니 거울 속 얼굴이 달라졌다.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이게 나라고?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제는 그냥 아저씨다.
대신 건강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해서 번 돈,
'나이 들어서 내 몸 치료하는데 다 쓴다.'
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야겠다 싶다.
언젠가 예능 프로그램 '아는 형님'에서 프로듀서 박진영에게 물었다.
“50대가 되어도 어떻게 그 피부와 건강을 유지하나요?”
그의 대답은 짧고 명확했다.
좋은 걸 먹는 게 아니라, 나쁜 걸 안 먹는 게 비결이에요.
이제야 그 말이 이해된다.
무엇을 더 얻을까보다,
무엇을 덜 하느냐가 중요한 나이가 된 것이다.
어린 시절 어른들이 했던 말들이,
그때는 '나이 든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내가 그 나이가 되어버렸음을 느낀다.
어른들 말씀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