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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안경

by 나날

나에게는 안경이 하나 있다. 글을 쓸 때만 쓰는 안경이다. 왠지 안경을 쓰면, 글을 잘 쓰는 것 같이 느껴져서 현실 도피용으로 즐겨 쓴다. 히....


아마 슈퍼맨도 이렇지 않을까? 팬티 한 장 겉에 입으면, 왠지 힘이 세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다 보니 진짜로 힘을 좀 과하게 쓰게 되는 플라시보* 효과 말이다. 물론 슈퍼맨의 팬티는 도피용이 아니라 초능력이라고, 친구들이 나에게 조언과 핀잔을 섞어가며 '제발 정신을 차리라' 신신당부할 것을 안다.


아, 나는 친구들 말에 주로 줏대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표현을 '나는 작가 안경을 쓰면 초능력이 생긴다'로 바꿀 수 있겠다. 겁이나 체면을 잊어버리는 초능력이랄까. 한동안 안경을 쓰지 않았더니, 차마 글을 발행하지 못하겠더라. 안경 없이, 그러니까 맨 정신으로 내가 쓴 글을 읽어보면, 마시던 커피에도 체할 지경이니.. 그것을 세상에 내놓을 배짱은 내게 없었다.





그러던 중 '바지 위에 팬티를 입는 것도 아니고, 안경만 코끝에 걸면 되잖아?'라는 살짝 가뿐해지는 생각이 머릿속에 찾아와서, 오늘은 안경을 좀 써봤다. 그랬더니 이봐, 벌써 여기까지 술술 적고 있는 것 좀 봐. 놀라운 초능력이다. 시야가 좀 흐릿해지며 겁이 없어지니, 복잡한 심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은근히 재밌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는 무릇 알코올의 효과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이점은 일단 무시하기로 한다.


무시해도 될까?...

마음이 다시 산란해지려고 하니, 안경을 한번 더 올려 써본다.





휴, 나에게 안경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 플라세보(placebo)가 표준어이지만, 제 입에 이미 붙어 자연스러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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