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유령 타령

by 나날

쌓여있는 설거지 거리들을 모두 클리어시키고, 싱크볼이 텅 빈 상태로 고무장갑을 벗는 순간이 좋다. 이때 느껴지는 상쾌함은 쾌감에 가깝다. 그런데, 요 며칠 우리 집 설거지가 이상하다.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서면, 구석에서 무언가가 또 발견되곤 한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끝났다!"

유독 설거지 양이 많았던 날이었기 때문에, 마치고 돌아서며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그 순간 한쪽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음산한 기운이란..


아침밥 준비할 때 쓴 후라이팬을 가스레인지 위에 그냥 두었는데, 그걸 빼먹었지 뭔가. 가사 노동을 했으니 뭘 좀 먹고 싶은데, 그럼 또 설거지 거리가 쌓이고… 설거지를 막 끝낸 내가 느껴야 하는 상쾌함은 도대체 왜 이렇게 금세 박탈되는 건지! 이런 푸념이 머리를 채우려는데,


아까 느껴지던 그 '음산한 기운'이 문득 떠올랐다. 분명 이 집에 무언가 있는 게 분명하다. 내 상쾌함이나 후련함을 시기하는 어떤 존재. 그것을 ‘귀신'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내가 너무 무서워지니 '유령' 정도로 수위를 낮추자. 직면해야 한다면, 처녀 귀신보다는 캐스퍼가 나으니까.


이러다 “오~ 이거 이야기 좀 되겠는데?”라는 무모한 생각을 하는 지경이 되었고, 그렇게 나는 혼자 키득거리고 말 잡생각을 붙들고 몇 날 며칠을 보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집안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밥을 먹거나, 먹고 난 접시를 아무데다 몰래 숨겨놓는 장면 등등..





그러느라 이번 주 연재글을 써볼 시간을 모두 날렸으니, 한 주 동안 생각한 거라곤 유령뿐이라고 자백하는 수밖에..





자신의 존재를 들킨 유령이 뜨끔해하거나, 내 글을 등 뒤에서 몰래 훔쳐 읽는 모습을 상상하면, 나는 재미있지만.. 내 스토리에 점점 자신없어지는 걸 보니, 오늘은 ‘작가 안경’을 아무리 치켜 올려도 그 힘이 약하다.


이런 날도 있는 거다.

이럴 땐 미련없이 마무리하고 그냥 빨리 자는 게 좋다.

유령은 무슨.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작가 안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