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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익 May 29. 2023

반도체 봉쇄: 중국은 미국을 추월할 수 있을까?


어느 나라가 더 뛰어난 반도체 기술을 확보하고 있는지 여부는 세계 시장을 둘러싼 이익 충돌을 넘어, 군사 안보적 측면에서 격차를 의미한다. 20세기 냉전 초반 소련은 미사일, 우주개발 기술 등에서 미국을 앞서갔다. 이는 미국에게 실제 전쟁이 일어나면패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을 주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트랜지스터, 집적회로 등 반도체 기술이 등장하면서 우위는 뒤집힌다. 진공관이 트랜지스터 칩으로 바뀌면서 미사일의 정밀 타격도는 어마하게 개선된다. 한발 늦은 소련은 미국 유학생 활용, 기술 탈취 등을 통해 반도체 기술을 추격하고자 애썼으나 미국과의 기술 초격차를 메꾸는데 실패한다.


 '초격차'란 단순한 양적 투자와 모방만으로는 메울 수 없는 격차를 의미한다. 반도체 산업에는 '무어의 법칙'이 적용되어 왔다. 무어의 법칙은 ‘마이크로칩에 저장할 수 있는 데이터 분량이 18-24개월마다 두 배씩 증가하는 법칙’이다. 이에 따르면 컴퓨터 성능은 5년마다 10배, 10년마다 100배씩 개선된다. 무어의 법칙은 손톱 만한 웨이퍼 위에 더 작고 얇은 선폭의 회로를 많이 새기는 방향으로 실현되어 왔고, 그만큼 현대 문명의 과학기술은 빠르게 진보했다.


반도체 산업은 기술 경쟁력과 효율성의 원리에 따라 복잡한 글로벌 가치사슬(GVC)을 형성해 왔다. 미국은 각종 원천기술과 지식재산권(IP)을 바탕으로 기술 표준을 만들고 반도체 설계도를 제공한다. 주요 반도체 소재 부품 장비는 네덜란드, 일본 등에서 제공된다. 대만, 한국은 앞선 나라들에서 제공한 설계도 및 소부장을 활용하여 정밀한 반도체를 생산한다. 분업화된 공급망 하에서 그 어떤 나라도 반도체 설계부터 생산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혼자 처리할 수 없다.


반도체 설계~생산 과정별 국가 특화도. / Bloomberg


글로벌 가치사슬 안에서 중국 또한 떼려야 뗄 수 없는 위치를 점해왔다. 중국은 거대한 공장이자 시장으로서 기능하며 반도체 산업을 키우고 기술 격차를 줄이고자 애써왔다. 2015년 중국은 ‘제조 2025’를 공약하며 2020년까지 40%, 2025년까지 70%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국가주의 경제 체제를 백분 활용하여 적극적인 자본 조달과 투자 지원으로 반도체 기업을 키웠다. 미국 실리콘밸리 • 대만 TSMC 출신 엔지니어를 대거 영입하고, M&A나 산업 스파이 등을 통하여 핵심 원천 기술을 확보해 왔다.


글로벌 시장에서의 반도체 판매량 지분 / The Economist.


그러나 중국의 부상이 미국 패권의 국제질서에 불안감을 주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중국이 첨단 기술 분야에까지 진출하게 되면, 이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을 넘어 국제 질서의 세력 변경으로까지 이어질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반드시 좌절되어야 한다.


2019년 11월 트럼프 행정부는 “정보통신 기술 및 서비스 공급망 확보에 관한 행정명령"이란 이름 하에 사실상 화웨이와 미국 기업 간의 거래를 금지했다. 2020년 5월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중국계 IT 기업들이 미국의 기술이 하나라도 들어간 반도체 소재/부품/장비를 구매할 수 없도록 하는 제재 조치를 발효했다. 심지어 미국 특허로 등록된 기술을 사용하는 제3국의 기업이 화웨이와 거래할 경우, 미국은 그 제3국의 기업을 제재할 수 있는 권리까지 갖게 되었다.


이로 인해 대만 TSMC는 화웨이와 그 자회사인 하이실리콘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서비스 제공을 중단한다. 대만 TSMC와의 거래 중단은 미세 패터닝 공정이 불가했던 중국 기업의 심각한 경쟁력 약화로 이어졌다. 하이실리콘은 그간 7 나노미터 칩을 TSMC 파운드리에서 생산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중국 파운드리 SMIC에서 14 나노미터 공정으로 후퇴한 버전의 칩을 생산할 수밖에 없에 된 것이다.


이어 미국은 유럽과 네덜란드 정부를 압박해 ASML의 EUV(극자외선) 노광장비가 중국에 유입되지 않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 EUV 구성 부품 및 핵심 기술 중 20% 정도가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반도체 미세공정 기술 수출 금지 대상을 10 나노미터에서 14 나노미터로 확대했다. 10 나노미터 이하 공정을 제대로 하려면 EUV 장비가 필요하다. ASML의 EUV 장비를 복제하려면 전 세계 각국에서 공급된 457,329개의 부품을 완벽하게 분석하고 조립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중국은 제재 이전에 들여온 EUV 장비를 활용하여 공정을 지속할 수 있다. 그러나 무어의 법칙이 적용되는 반도체 산업에서 2년 이상의 격차는 초격차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현재로서 중국은 EUV보다 한 단계 아래인 DUV 장비마저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다.



바이든 행정부에 이르러 대중 반도체 제재는 보다 강경해졌다. 2022년, 미국은 ‘칩4(CHIP4, 미국, 한국, 대만, 일본)’로 알려진 반도체 협력체제를 출범시켰다. 칩4는 사실상 미국 주도 반도체 동맹으로서 중국을 배제한 공급망을 구성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만약 칩4 동맹이 공식적으로 작동한다면, 미국은 앞서 언급한 ‘네덜란드 ASML 대중 수출 금지’ 제재를 동맹국에게도 확대 적용할 수 있다. 예컨대 일본에서 만들어진 에칭 장비는 (ASML의 EUV와 달리) 일본 내 부품과 기술 IP로만 완성되었다면 미국이 제재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 칩4이 가동된다면 ‘동맹‘의 이름으로 한국•일본•대만에서 생산된 부품이나 IP를 활용하는 제품의 수출 제재까지 요구할 수 있게 된다.


2022년 8월,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 반도체 칩과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 이하 반도체법)을 통과시켰다. 얼핏 보기에 반도체법은 바이든 정부가 자국 내의 반도체 제조를 활성화하기 위한 산업정책 정도로 보인다. 동아시아 지역에 위탁했던 반도체 생산을 국내에 다시 유치함으로써 경제안보 및 일자리를 보강하고, 5년 동안 2800억 달러를 반도체 제조 및 기초과학 연구에 투자하여 기술 격차를 벌리겠다는 계산이다. 가장 눈여겨볼 지점은 국내외 반도체 기업들에게 '중국과 거래하면 불이익을 주겠다'란 조항을 명시적으로 규정한 가드레일 조항이다.


반도체법에 따르면, 미국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은 국내외 기업들은 10년 동안 ‘중국이나 다른 우려 대상국’의 반도체 생산 능력을 확장하는 ‘중요한 거리(significant transaction)’에 관여하면 안 된다. 또한 ‘수출이 규제되는 기술’ 및 ‘우려 대상’을 새로 지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무 부서에 부여하였다. 이후 미국 상무부는 10.7 조치를 통해 슈퍼컴퓨터 및 고성능 컴퓨터에 들어가는 최첨단 반도체의 대중국 수출을 사실상 금지하였고, 일정 성능 이상 반도체(18 나노급보다 미세한 DRAM, 128단 이상 낸드 플래시 등)의 제조에 활용되는 장비 및 기술의 대중국 수출은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도록 만들었다. 미국 시민과 영주권자가 중국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는 경우에도 승인이 필요하다.


미국의 반도체 봉쇄는 갈수록 촘촘해지고 있고,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더욱 험난해질 것이다. 그러나 중국도 그저 당하고만 있지는 않다. 2023년 5월 22일, 중국은 기술 보안을 이유로 '미국 기업 마이크론 제품 구입 중지 조치'를 발표했다. 마이크론 입장에서는 하루아침에 주요 고객처가 사라진 것이다. 한 달 전 파이낸셜타임스(FT)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이미 마이크론 제재를 예상하고 한국에게 중국의 D램 부족분을 채워주지 말라는 요청을 했다고 한다. 이때가 윤석열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하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5월 27일, APEC 무역장관회의에서 만난 대한민국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과 중국 상무부장은 글로벌 공급망 영역에서 협력을 지속하자는 입장을 확인했다. (중국 "한국과 반도체 부분 협력 강화" 보도문 발표… 한중 양국 속내는?​, 세계일보.)



D램 메모리 중국 비중, 그리고 추세적으로 증가하는 한국의 대미 투자 / Bloomberg


이 일련의 과정이 무엇을 의미할까? 중국은 반도체 시장의 최대 수요자라는 단점을,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의 최대 구매자'로서 역이용할 수 있다. 그 어떤 국가/기업도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는 우리나라에게 딜레마와 같다. 현재 삼성, SK하이닉스는 D램 메모리칩 부문에서 선두를 달리며, 중국에서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그렇기에 중장기적으로는 탈(脫) 중국을 하더라도, 내일 당장 영업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미국을 위해야 할 이유는 없다. 중국은 이러한 글로벌 가치사슬의 연결고리를 이용하고 동맹국들의 균열점을 파고드는 전략을 취해나갈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은 국가주의 경제 체제 특유의 치열함으로 독자 생존법을 찾아갈 것이다. 2020년 8월 중국은 첨단 기술 자립을 공식적으로 천명하며 프로젝트 이름을 ‘난니완’으로 명명했다. 난니완은 1930-40년대 당시 중국 공산당 팔로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쳤던 장소의 지명이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중국에게 반도체 굴기는 결자항전의 전선이다. 중국은 거대한 내수시장, 강력한 투자 인프라, 기초과학 경쟁력을 통하여 상대적으로 기술 집약도가 낮은 부문부터 추격하고 있으며, 양자컴퓨팅과 같은 아예 새로운 필드에서 게임 체인저를 노려볼 것이다.


반도체 패권 경쟁은 모두에게 마이너스인 게임이다. 오늘날 반도체 글로벌 가치사슬이 복잡하게 얽히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를 다시 인위적으로 분리하려는(디커플링) 시도는 어마한 비용과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대만 TSMC 창업자인 모리스 창을 비롯한 많은 반도체 업계 기업인들이 과도한 무역 및 기술 제재를 우려하는 이유다. 특히나 미중 사이에서 자유무역을 바탕으로 오고 가던 우리나라에겐 손해인 상황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던’ 세계화 체제는 끝났다. 이제 지정학적 이슈가 자유무역 질서보다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미국이 자국 패권 유지를 위해 동맹국에 경제적 양보를 강요하는 행태를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중국이 미국 우위에 있는 국제질서'가 '미국 주도의 세계화 자유주의 국제질서'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당장 먹고사는' 시장 논리보다 '죽고 사는' 안보 논리가 우선시 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미국은 쉬운 나라가 아니다. 미국은 20세기 냉전에서 소련을 꺾고 세계화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이끌어온 당사국이며, 반도체 산업에 국한해서 보더라도 1980년대 부상하던 일본 반도체 산업을 견제했던 선례가 있다. 또한 미국은 여전히 전 세계 혁신 기술의 선두를 달리고 있다. 몇몇은 ‘미국이 지배하던 세계는 끝났다'라고 얘기하지만, 생성형 AI를 포함해 최근 이슈가 되어온 뜨거운 혁신 기술의 표준들은 미국 기업들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이런 이유들로 중국이 미국을 꺾고 반도체 굴기를 달성할 가능성은 낮다. 중국의 거대한 시장 또한 단기적으로는 비용이 들겠지만 인도, 아세안 국가 등으로 충분히 대체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중국을 쉽게 보아서도 안 된다. 중국은 이미 메모리 반도체 부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제조업에서 한국을 추격했고, 기초과학 및 산업 분야에 과감한 투자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중국은 더 이상 질 낮고 싼 물건만 생산하던 공장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냉정한 시각을 유지하며 안보•가치 동맹인 미국과의 기술 협력에 중심을 두면서, 중국과의 상호존중 관계를 유지하며 위기를 관리해야 한다. 무엇보다 기술 경쟁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의 시장 점유율을 사수하고, 기초과학 및 반도체 설계 부문 등에 투자를 확대하며, 수도권 반도체 클러스터의 국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확실한 기술 경쟁력' - '유능한 외교'를 바탕으로 위기를 돌파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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