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형 교수를 처음 알게 된 날은 평소에도 보지 않는 TV를 심심해서 틀었던 때였다. 차이나는 클래스에서 ‘수’ 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내용에 나는 금방 빠져들었고, 어느새 김민형 교수님의 다른 영상들도 찾아보고 있었다. 김민형 교수님은 내가 평소에도 굉장히 관심이 많았던 교수님이었다. 옥스퍼드 교수님이셨고, 서울대학교 최초 조기졸업생이기도 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가장 인상이 깊었던 건 옥스퍼드도, 서울대도 아닌 몸이 아파 ‘중학교 시절 혼자 공부’ 했다는 사실이었다. 잠깐 국제학교에 다니다 2년 동안 혼자 공부하며 중학교 시절을 보낸 나에겐 김민형 교수님도 나와 비슷한 중학생 시절을 보냈다는 것이 나에겐 신선하면서도 설레었다. 오히려 중학교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김민형 교수님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중학교에 다녀보지 않은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럴 것 같기도 했다.
책을 피고, 첫 단원을 읽기도 전 나는 벌써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작하며’라는 소단원에서, 김민형 교수는 몇백, 몇천 년 전에는 전문가와 천재들만 알고 있던 사실들을 지금 우리는 모두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다는 점 - 수학은 상향평준화가 계속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차이 나는 클래스에서의 강연에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했었기에, 그다지 놀랍진 않은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진 교수님의 말에 나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부터 사람들은 자연의 구성 요소를 연구하고 발견해 왔습니다…(중략).. 즉, 작고 분리된 개체가 결합하여 우리가 인식하는 공간과 시간의 매끄러운 외관이 형성된다는 가능성을 허용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능성을 100년 전에 과학자들은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일어난 시각 기술의 진보는 이런 시나리오를 꽤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어줍니다...이제 사람들은 심지어 학생들도 컴퓨터 모니터에 보이는 연속된 이미지가 각각 분리된 수많은 스킬 컷과 유사한 픽셀이 조합되어 만들어진 환영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시작하며’ 18~19p)
이 단락은 무언가 나만을 위한 단락 같았다. 나만 알아들을 수 있도록 교수님이 은밀하게 남겨두신 비밀 단서 같았다! 얼핏 읽으면 이러한 의문이 들 것이다. ‘작고 분리된 개체가 우리 공간을 만든다는 것과, 유사한 픽셀이 조합되어 만들어진 환영인 모니터가 대체 무슨 상관인데?’ 나도 만약 내가 평소에 초끈이론에 관심이 있지 않았다면 이러한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나는 저 내용이 초끈이론의 기본적인 가설을 언급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끈이론이 탄생하게 된 중요한 배경은 양자역학과 일반 상대성 이론을 합치는 과정이다. 거시세계에서 상대성 이론은 오류 없이 동작했고, 양자역학은 원자단위의 작은 단위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현상을 정확히 설명했지만, 초미세영역에서 상대성이론의 중력방정식을 적용시키는 것이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양자역학에 의하면 매우 작은 시공간에서는 양자요동이 일어나 일반 상대성이론의 방정식으로는 시공간이 매끄럽게 휘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과학자들은 매끄럽지 않은 초미세영역을 매끄럽게 피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 방법이 바로, 물질의 최소 크기가 이 양자요동이 일어나는 크기보다 크다면 양자요동의 효과는 무시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가 사진을 찍으면 그 사진의 최소 단위가 픽셀이고, 그 하나의 픽셀 안에서 빨간색과 파란색이 합쳐지면 - 즉 양자 요동을 일으키면 그 픽셀은 보라색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말이 바로 김민형 교수님이 살짝 언급한 저 내용이다! 저 가설로 인해 끈이론은 지금까지 세상의 모든 물질이 무한히 작은 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과는 달리 물질에 크기를 부여했다. 물질도 최소한 끈의 길이만큼의 크기가 존재하는 것이고, 이 끈의 크기보다 짧은 크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길이를 플랑크 길이라고 부른다. 즉, 플랑크 길이에서 일어나는 양자요동은 플랑크 길이 내에서 평균값으로만 나타내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모니터에 있는 미세한 픽셀들이 RGB 색들을 조합해 하나의 색으로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끈이론 전까지는 우주를 만들었던 빅뱅은 무한히 작은 하나의 점으로 시작했다고 생각했지만, 끈이론 덕분에 빅뱅의 최소크기는 플랑크 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저 하나의 가정으로부터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까지 예측할 수 있다니,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인가?
첫 단원은 수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제목이 수학이 필요한 순간이지만, 수학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그것을 어디에 쓸 것인가를 알 수 있지 않나. 책에서는 수학은 논리학이 아니라 강조했다. 나에겐 약간의 충격이었다. 당연히 수학 문제를 풀 때도, 어려운 문제일수록 논리가 중요했고 주변 거의 모든 수학 선생님들께서도 수학은 논리라고 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학만이 논리를 쓰는 학문이 아니며 수학에서 논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또한 있기 때문에, 수학은 절대 논리학이 아니며 그렇게 착각하는 수학자들도 많다고 김민형 교수님은 강조했다. 난 의문이 들었다. 순순히 받아들이기엔 기존의 지식이자 편견이 될 수도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수학만이 논리를 쓰는 학문이 아니라고 해서 수학이 논리학이 아닌 것은 아니지 않을까? 단지 다른 학문들이 논리학이자 ‘수학’을 쓰는 것이었다면? 그리고, 대체 논리가 필요하지 않은 수학이란 무엇인가? 만약 책에서 정확한 예시를 들어주었다면 훨씬 빠르고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김민형 교수님은 수학을 ‘추상적인 개념적 도구를 이용해 세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의도”라고 했다. 솔직히, 전혀 와닿지 않았다. 쓰인 단어가 어려웠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무엇보다 나의 수학에 대한 학문적 지식이 부족했다. 반면에 책에 인용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말 - ‘우주의 언어는 수학적 언어이다’가 나에게 가장 와닿았다. 애초에, 나도 수학이 무엇인지 설명할 일이 오면 항상 수학은 우주의 언어이며 그 언어로 만드는 문장과 문단, 이야기들은 과학이라고 설명하곤 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진 이 말을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했는지조차 몰랐다. 나만 느낀 게 아니었던 것이다 - 아니, 수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느꼈는지 모른다. 하나, 내게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설명이 가장 와닿았던 것은 내가 ‘수학이 필요한 순간’을 단편적으로밖에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수학이 필요한 순간은 수학 문제를 풀 때와, 물리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말고는 없었다. 물리의 궁극적인 목표야말로 우주를 하나의 방정식으로 서술하는 것인데, 여러 학문 중 천체의 운동을 수학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갈릴레오가 내린 수학의 정의에 물리와 수학을 많이 공부한 나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지 않나.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선 김민형 교수의 수학에 대한 정의야말로 갈릴레오의 정의를 한 단계, 아니 몇백 단계 발전시킨 정의임을 깨달았다.
두 번째 단원은 역사를 뒤바꾼 수학적 발전에 대해 설명한다. 거의 모든 과학 서적들이 이러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브라이언 그린의 엘레건트 유니버스나, 미치오 카쿠의 초끈이론, 피터 워이트의 초끈이론의 진실 등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학 서적들도 마찬가지로 모두 ‘과학과 수학의 역사적인 발견’을 설명하는 내용들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어떤 내용이 나올지 얼추 예측을 해보았으나, 뉴턴의 운동법칙 단 하나밖에 맞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 운동법칙을 설명하는 방식 또한 난생처음 보는 방식이었다. 마치 수학과 물리의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진,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설명이었다. 물리를 이해하며 수학을 이해하고, 수학을 이해하며 물리를 이해하는 듯했다. 애초에 물리와 수학이 서로 경계가 있긴 하나 싶지만, 김민형 교수님의 설명은 나를 깊은 충격에 빠지게 하는 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책에 나온 세 가지 역사를 바꾼 수학적 발전은 페르마 정리, 뉴턴의 운동 법칙, 좌표평면의 발명이다. 먼저, 페르마 정리라고 하면 흔히들 “n이 2보다 클 때, x^n+y^n=z^n 방정식을 만족하는 x, y, z (x, y, z는 모두 양의 정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정리를 먼저 떠올린다. 나 또한 그랬다. 페르마 하면 생각나는 것이 저 정리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 정리는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이고, 여기서 말하는 페르마의 정리는 훨씬 흥미로웠다! 빛은 물을 지나갈 때 매질이 바뀌기 때문에 진행 속도가 바뀌고, 결론적으론 굴절한다. 이 때문에 빛이 지나가는 경로는 항상 최단거리이다. 마치 바닷가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해변가로부터 달려오는 해상구조대가 사람까지 일직선으로 가는 것이 아닌, 빨리 달릴 수 있는 모래사장에서 최대한 많이 달린 다음, 느린 물속에선 짧은 거리로 가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굉장히 괴상한 추론을 할 수 있다. 빛은 해상구조대처럼 가장 짧은 거리를 스스로 ‘판단해서’ 움직이는 것일까? 사실 빛은 지적 생명체인 것일까? 이처럼 목적성을 가진 것을 ‘Telos’라고 하는데, 이는 현대 과학에서 완전히 부정하고 있는 개념이다.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이냐 하면, 대류 현상을 단지 ‘뜨거우면 위로 가고, 차가우면 아래로 갈려고 하기 때문에’라고 설명하는 것과 같다! 오히려 빛이 최단경로를 스스로 판단해 간다는 이야기보다 터무니없는 설명조차 찾기 힘들 것이다. 이 괴상망측한 추론은 페르마 정리가 나오고 무려 16년 동안 해결되지 못했다. 빛은 파원을 스스로 계속 만들며 사방으로 전진하는데, 가장 빠른 경로가 아닌 것들은 다 상쇄된다는 하위언스의 원리가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책에 나온 설명은 너무나도 턱없이 부족했다. 마치 교수님이 ‘이 내용은 어려우니 이 정도까지만 알고 지나가자!’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책에는 빛이 상쇄되는 이유를 단지 ‘수학적으로 정확히 따져보면’이라고 설명해 놓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직접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공부해보아야 했다.
유튜브 Hasan Sayginel
이 사건이 수학계를 왜 뒤집어 놓았을까? 이 또한 책에는 상세하게 설명되어있지 않지만, 목적성 - Telos를 과학적인 접근으로 없애려는 거의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사건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또한, 거의 모든 물리적 시스템은 무언가를 최적화하면서 진화하는데, 이러한 발견의 시발점 또한 페르마 정리였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발견은 뉴턴의 ‘프린키피아’에 실린 뉴턴의 운동법칙이다. 먼저,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번 시작하면 10장도 넘게 이야기할 것 같으므로, 간단하게만 이야기하겠다. 먼저 뉴턴은 뉴턴 이전까지는 정설로 여겨져 오던 ‘힘을 가하면 물체가 움직인다’는 가정에 의문을 느꼈다. 달려가는 공에 힘을 가하면 공을 멈출 수도 있지 않는가? 여기서 뉴턴은 힘을 가하면 ‘속도’가 생기는 것이 아닌 ‘속도가 바뀐다’라고 생각했다. 즉, A) 힘을 가하면 가속도가 생긴다 라는 첫 번째 운동법칙이 나온다. 또한 여기서 힘을 많이 가할수록 가속도는 당연히 커질 것이므로, B) 힘을 가하면 가속도가 생기고, 힘이 클수록 가속도는 커진다 라는 두 번째 법칙이 나오고, 가장 정밀한 법칙인 C) 가속도는 힘에 비례한다 즉, 그 유명한 F=ma 가 나오게 된다! 한 질문에 대한 간단한 의문점이 세상을 바꾸는 법칙을 만들어 낸 것이다.
얼핏 생각해 보면, 모든 유명한 발견은 하나의 소소하고 일상생활에서도 찾을 수 있는 의문점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 법칙을 생각해 냈고, 아인슈타인이 빛보다 빨리 달리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 나오게 된 것이 상대성 이론이듯이 말이다. 나는 여기서 간단한 추론으로부터 역사적 발견까지 다다르게 되는 질문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지식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2개가 있다. 하나는 납득을 하는 것이고, 하나는 이해를 하는 것이다. 공부를 하다 보면 어떠한 것들은 나의 지적 수준을 벗어나기 때문에 “납득”을 해야 할 때가 다분히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납득해 버린 지식들은 무조건 메모해 둔다. 또는, 너무나도 궁금할 때는 난이도에 불문하고 끝까지 찾아본다. 하지만, 가끔씩은, 정말 중요한 것이, 내가 납득해 버린 것을 내가 이해를 했다고 착각할 때가 가끔씩은 있다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초등학교에서도 배우는 사실이다. 지구는 자전한다. 그런데도 물체들이 지구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왜? 지구가 물체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력 (만유인력)이라는 힘에 의해 끌어당겨지는 것이다. 왜 중력은 무언가를 끌어당기는데?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중력은 시공간을 휘게 하기 때문이다. 양자론에 의하면, 중력은 중력자라는 입자를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힘이 전달된다고 한다. 이 두 이론은 충돌한다. 이 충돌을 없애는 이론 중 하나가 초끈이론이다. 이처럼 단순한 초등학교 지식에서도 질문하는 힘만 있다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까지 이어갈 수 있다.
뉴턴도 마찬가지지 않았을까? 고전적인 과학에서의 ‘힘’에 대한 정의에 의문을 가지고, 뉴턴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놓았고 그 해석을 수학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미분과 적분까지 만들었다. 이 수학적 도구들을 이용해 만유인력까지 계산할 수 있게 되었고, 뉴턴 이전까진 단순히 관찰만 했던 행성들의 운동을 예측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우주에서 보면 먼지보다 작은 생명체들인 우리가 하늘 위의 수많은 별과 행성들의 운동을 예측하고 계산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가슴 떨리는 발견이 아닐 수가 있을까.
하지만, 대부분은 “우리가 지구에 서있을 수 있는 이유는 중력 때문” 에서 생각하기를 멈춘다. 만약 뉴턴도 고전적인 힘에 대한 정의에서 반론하기를 멈추고 그를 바탕으로 연구를 계속했으면, 우리는 아직도 마차를 타고 다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뉴턴이 역사적인 발견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정의에 대한 반론을 생각해 내는 비판적 시각과 용기 때문이다. 우리가 뉴턴, 아인슈타인처럼 질문하지 못하는 것이 물론 이해는 간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중력은 질량이 가진 물체끼리 서로 끌어당기는 힘” 와 같은 정의 자체를 납득해 버렸기 때문이다. 질문해야 한다. 왜 그런지. 우리가 질문하는 힘이 약한 이유는 주어진 현실에 굴복하며 살아가기 때문이 아닐지 ,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기 너무나도 힘든 주변 환경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질문의 힘은 상상을 능가한다. 세상의 모든 변화는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했다. 질문의 수준은 어렵지 않다. 다만, 무언가를 비판적으로 본다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학교에서는 무언가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있지 않다. 우리는 누군가가 가르쳐주는 것을 ‘아 그냥 그런 거구나’ 하고 받아들일 때가 많다. 우리는 어떠한 지식에 대해 끊임없이 “왜 그런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이것의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의 기본자세이다. 내가 무언가를 알고자 하는 의지조차 없는데 어떠한 정보를 강제로 머릿속에 주입하는 지식은 알 필요조차 없다. 알아봤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단지 내신 점수라는 수치로만 드러날 뿐이다.
왜 그런지 모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만국공통이다. 누구다 그런다. 하지만, 어디까지 내가 모르는지 모르고 그냥 그렇다는 사실을 납득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특히 한국 학생들이 말이다. 이는 공부를 하는 ‘목적과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이다.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좋은 고등학교와 좋은 대학교를 가기 위함이고, 좋은 대학교에 가면 좋은 직장을 갖게 되어 안정적인 삶 (금전적으로)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성공적인 미래 = 학교 성적이 돼버린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겠지만, 공부를 하는 학생들에게 이것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니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가. 심지어 시키는 대부분의 공부가 납득을 시켜버리는 주입식 교육이지 않은가? 내신은 90% 이상이 암기이며 본질을 이해하는 것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지 않은가? 이러한 공부가 정말 효과가 있는 것일까?
여하튼,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말로 하는 과학과 체계적인 이론으로 만들어 내는 과학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엄청난 인류의 발전이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거의 모든 과학책에 필수적으로 등장할 만큼 가장 중요한 발전이었다. 하지만, 인간은 완벽하지 않으며, 뉴턴 또한 인간이다. 뉴턴은 프린키피아에 ‘왜 만유인력은 질량을 가진 물체끼리 끌어당기는지’에 대해 본인도 모른다고 설명해 놓았다. 후세에 부탁한 것이다. 뉴턴의 의문 또한 페르마의 정리처럼 굉장히 괴상하다. 만유인력은 질량을 가진 물체가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작용하는 것일까? 유령이 잡아당기는 것인가? 중력은 대체 무엇을 통해 전달되는 것일까?
책에서는 여기에서 내용이 끊겼다. 저 의문에서 바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탄생하는데,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되어있지 않았다. ‘수학이 필요한 순간’ 은 수학에 대해 대중들에게 설명하는 책이기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 것 같다. 하지만, 아쉬움은 있었다. 김민형 교수만의 수학의 본질을 꿰뚫는 듯한 필체로 상대성 이론을 설명하는 것을 자세히 읽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간단한 설명은 마지막 역사적인 수학적 발견 - 좌표계의 발견에 적혀 있었지만, 아직 아쉬웠다. 너무나도 아쉬워 김민형 교수님께 이메일로 여쭈어 보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거의 모든 외국 과학서적들을 번역하신 카이스트 박병철 교수님처럼 이메일 주소를 찾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도 김민형 교수님의 이메일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새로 나온 ‘다시, 수학이 필요한 순간’까지 다 읽고 이메일을 꼭 보낼 예정이다.
좌표계의 발견은 예상하진 못했지만 어떻게 생각해 보면 정말 당연하게도 수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가 맞다고 생각한다. 공간상에서 어떤 물체가 어디에 있고, 어떻게 이동하는지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는 수단이 좌표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통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했던 데카르트가 좌표계를 고안해 냈다 하면 다들 놀라기 마련이다. 나 또한 예전에 그 사실을 처음 접하였을 때 많이 놀랐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다양한 학문이 깊이 있게 발전하기 전에는 딱히 학문에 대한 구분이 많이 없었던 것 같다. ‘수학자’ 나 ‘과학자’ 보다는 ‘철학자’가 거의 모든 학문을 연구했다. 어떻게 보면 철학에서 모든 학문이 갈라져 나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앞서 강조했던 것처럼 철학이 결국 질문하는 것이고, 질문이란 새로운 지식을 향한 시작이기 때문이다.
2단원까지는 내가 한 번쯤은 모두 들어보았던 내용들이라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이해하기도 어렵지 않았고, 굉장히 술술 읽혔다. 하지만, 3장부터는 순탄하게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예상이 산산조각 나는 동시에 나의 수학에 대한 편견 또한 산산조각이 났다.
수학을 철학과 접목시킬 수 있을까? 대부분이 말도 안 될 것이라 말할 것이다. 당연하지 않을까? 중, 고등학교 때 배우는 수학이라 해봤자 연산, 미분, 적분, 기하 등등 현실에는 전혀 쓰이지 않는 수학인 데다 현실에 정말 쓰이는 수학을 공부하려면 적어도 대학에 들어가야 배운다. 우리가 느끼는 ‘수학이 쓰이는 순간’ 은 기껏해야 물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러한 우리의 착각을 김민형 교수님은 지적한다 - ‘결국 모든 삶은 수학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처음에 김민형 교수님이 내린 수학의 정의가 굉장히 어색했다. 내가 아는 수학이 쓰이는 순간은 물리와 문제 풀 때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수님은 수학을 철학과 윤리적인 문제에 접목시킨다.
‘A와 B가 있다. 이 두 명은 각각 1 만원씩을 내서 판돈 2 만원을 만들었다. 이들은 동전 던지기 게임을 하는데, 앞면이 나오면 A가 1점, 뒷면이 나오면 B가 1점을 얻고, 목표 점수에 먼저 다다른 사람이 판돈을 다 가져간다. 이러한 게임이 진행되고 있는데, 만약 갑자기 중간에 게임이 중단되면 판돈은 어떻게 나눌 것인가? 확률론의 선과 악 (116~117p, [점수의 문제 Problem of Points] 요약
이 질문은 루카 파치올리가 던진 질문이며, 이 질문 또한 ‘확률’이라는 개념을 탄생시킨 질문이다. 교수님은 이 질문 또한 역사적인 수학적 발전이라고 말씀한다. 게임이 갑자기 중단되면 판돈을 어떻게 나눠야 하는 것일까?
만약 A가 이기고 있었으면, A가 다 가져가면 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게임이 끝나기 전까진 아무도 그 결과를 알지 못하니 이는 부당하다. 그렇다면 중간에 끊겼을 때의 점수가 5:3이면 판돈을 5:3으로 나눠 가지는 것은 어떤가? 하지만 만약 5:3이 아니라 500:300이라면? 그리고 목표 점수가 501점이었으면? 그렇다면 500점인 사람이 사실상 이긴 것이 아닐까?
이 ‘점수의 문제’는 한동안 잠잠하게 묻혀있다가, 뉴턴이나 갈릴레오 등 중요한 인물들이 줄줄이 나왔던 17세기에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파스칼과 페르마였다. 2개월에 걸쳐 편지를 교환하던 이들은 마침내 ‘확률’이라는 개념을 고안해 내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즉, 지금까지 딴 점수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앞으로 일어날 점수들의 경우들이 어떻게 되는가가 중요했던 것이다. 이때 당시만 해도 확률이라는 개념은 천재들만 이해할 수 있었던 개념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일기예보를 보며 ‘내일 비 올 확률은 36%’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수학과 인문학의 관련성, 그리고 틀려도 되는 수학, 오일러 법칙과 위상수학 그리고 기하에서 대수가 나오는 것이 아닌 대수에서 기하가 나오는 것이며 우주 자체가 대수적인 존재이다는 것, 벡터 그리고 우주의 구조, 인터스텔라의 곡면구조, 리만의 곡률텐서, 그리고 일반상대성이론 온갖 흥미로은 이야기들은 스포방지를 위해 적지 않겠다!!)
결국 이 책을 모두 읽으며 든 생각은, 점수와 내신만을 위한 지겹고 정형적인 문제풀이만을 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수학에 대한 흥미와 관점을 완전히 부정적으로 바꿔 버린다는 것이다. 이 얇은 책 속에도 수학은 물리, 경제, 인문, 도덕, 우주 등 적용되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쓰이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진정한 수학을 공부하게 되면 알게 되는 내용이 얼마나 많을지 벌써 기대가 되지 않는가? 이를 전혀 느낄 수 없게 하는 한국의 수학 교육과정이 아쉬울 따름이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내가 한국에 있고, 그 교육과정을 따르는 학교에 몸을 담은 이상 나 스스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수학은 무조건 맞아야 한다는 생각을 깨부수고, 틀려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며 사고를 해야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다. 거침없이 질문하는 용기와 패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틀리는 것에 두려워하지 말고, 새로운 발견을, 변화를 꺼려하지 말아야 한다! 정답과 점수와 내신만을 목표로 둔 수학보단, 끊임없이 비판적이고 좋은 질문을 먼저 던지는, 즉 ‘수학적 사고’를 해야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인슈타인의 명언,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