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메리칸 삼고초려

미국회사에서 새벽 3시 야근기록

by 유희

2018년 미국에서 K회계법인에서 일 할 때였다. 나는 회계감사파트에서 일하고 있었고, 매년 1월에서 4월까지는 살인적인 스케줄이 이어졌다. 데드라인이 정해진 일이었고 나 혼자만 잘한다고 빨리 진행되는 일이 아니었다. 감사는 고객사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나는 3년차 시니어senior였고 감사팀을 이끌어가고 고객사를 관리해야 하는 자리에 있었다. 그 해에 내가 맡은 고객사는 인수합병을 밥 먹듯이 하는 반도체 회사였고, 나의 고객사 컨택트였던 부사장은 늘 바빴다. 큰 돈이 오가는 딜을 앞두고 있으니 규제상 해야만 하는 회계감사는 늘 뒷전이었다.


데드라인은 다가오고 있었고 파트너의 압박이 시작되었다. 부사장은 내가 보낸 모든 이메일에 묵묵부답이었고 사무실에 찾아가면 회의 중이었다. 미팅과 미팅을 오가는 부사장과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는 좀 기다려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애원도 해보고 데드라인을 놓칠 수도 있다고 협박도 해봤지만, 그는 너무 바빴다. 이 딜만 성사되면 회계사들 연봉의 몇 배가 되는 보너스를 받을 사람이니 회계감사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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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성질이 나기 시작했다. 더욱 나의 K성깔을 도지게 했던 건 감사파트너의 말이었다. “레이첼, 남자직원을 보내 보지 그래?”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여자라서 고객사를 충분히 푸쉬하지 못했다는 뉘앙스이기도 했고, 부사장이 내가 여자라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거였다. 그 날 나는 부사장이 퇴근할 때까지 사무실에 남아있기로 했다. 센서등이 자꾸 꺼져서 10분에 한 번씩 만세를 해가며 일을 했다. 새벽 2시가 다되었는데도 이 독한 인간은 퇴근할 생각이 없었다. 새벽 2시 10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서 부사장실로 뛰어갔다.


어두운 복도에 내가 뛰자 센서 등이 하나 둘 켜졌다. 부사장이 나를 보자 귀신이라도 본 듯 눈이 둥그레진다. ‘그래 이 새끼야. 너 때문에 지금까지 여기 있었다.’ 속으로 생각하며 다가갔다.


“레이첼, 아직 일하고 있었어?”

“응, 너 기다리고 있었지. 나 너한테 받을 게 많잖아?”

그 순간 부사장의 웃음이 터졌다. 아마 그도 그 동안의 업무량과 인수합병 거래의 압박감에 힘들었을 테다. 낮 동안에는 늘 사무적인 얼굴을 쓰고 있던 그도 퇴근길엔 긴장이 풀리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너 정말 집요하다.”

“응, 나 집요해. 한 시간만 내줘.”

그렇게 나는 그날 밤 부사장실에서 노트북을 앞에 두고 새벽 3시반까지 필요한 서류들을 받아냈다. 그와 나 둘 다 지칠 대로 지쳐 집으로 돌아갔다. 그 감사는 데드라인을 놓치지 않고 잘 마무리가 되었고, 나는 파트너에게 남자직원을 보내서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부사장은 파트너에게 레이첼이 자기를 퇴근 안 시켜준다고 농담을 했다. 그 후론 부사장이 이메일에 답을 꼬박꼬박 잘 해주었다. 새벽 2시에 어두운 복도를 뛰어오는 레이첼을 보지 않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