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코미디 쇼츠 영상에서 석사학위논문을 떠올리다
필자의 변
한동안 브런치에 글을 쓰지 못했다. 7월달에 있었던 한국문학교육학회 학술대회 발표문을 쓰면서부터였다. 논문의 글쓰기와 브런치의 글쓰기는 퍽 달라서, 논문의 글쓰기에 몰두되어 있는 내가 쓰는 시에 관한 문장들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를 골라두고 그 아래에 논문식의 문장들이 적혔다가 통째로 삭제되었다가 했다. 한창 작가의 서랍에 골라둔 시만 쌓이던 날 중에 하루는 SNS에 다음과 같이 적기도 했다.
세 달째 브런치에 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골라둔 시만 3개인데도 그 어느 감상문도 제대로 적기가 어렵다. 말랑말랑한 글쓰기는 어떻게 하는 거더라? 한때 나는 내 시에서 물집만 잡히고 굳은살이 박히지 않았다는 표현을 쓴 적이 있었다. (중략) 그냥 내가 시를 읽어나가는 과정을 기록해야겠다는 자유로움은 사라지고 논문식 글쓰기가 굳은살처럼 박혀서 문장을 썼다가 지웠다가 한다. 논문식 글쓰기의 치명적인 단점은 실제 논문이 되지 못하고 버려지는 문장과 아이디어가 많다는 데 있다. 문학 읽기와 감상의 발산성과 창발성을 주제로 논문을 쓰려고 하면서, 나의 발산성과 창발성은 억제하고 엄밀한 척 그럴듯한 척을 하는 문장들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가 않는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한국독서학회에서 발표를 했다. 엉뚱하게도 내가 하고자 하는 주장에 집중해야 할 시기에 나는 브런치를 다시 떠올렸다. 시 읽기와 관련해 내 나름의 방식으로 시를 해설하는 것을 중심으로 쓰기로 했지만, 그 틀 때문에 오히려 쓰지 못한다면 이게 무슨 소용이랴.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떤 문장이든 일단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논문이라도 옮겨 적을지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3일째 새벽까지 깨어 있던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의 집중이 끊기고 유튜브 쇼츠로의 여행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 문제적인 영상과 나는 맞닦뜨린 것이다.
이 코미디 영상을 보자마자, 나는 나의 석사학위논문을 떠올렸다. 나는 이 생각을 글의 형태로 가두기 위해 인스타그램을 켰다. 직관적으로 떠오른 나의 사고들은 다음과 같았다: 내 석사학위논문은 '현대시 환유 표현'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환유에 대한 여러 문헌들을 참고하여, 현대시에 나타나는 특정 표현들-특히 학교 문학교육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는-이 환유의 원리에 기반한 것임을 주장했다. 코미디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표현들의 연쇄를 통해 웃음을 유발하고 있었다. 내 논문에서는 환유의 원리를 네 가지로 제시했는데, 그 중 하나의 원리에서 환유 표현은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원관념의 참조점만을 제시하여, 오히려 그 의미를 해체하는 데 있었다. 원관념을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고 그 원관념으로 향하기 위한 참조점이 연쇄적으로 제시되면, 오히려 원래 말하고자 했던 바는 사라지고 언어의 물질성과 유희가 남는다...
까지 써내려가다가 이마를 탁 쳤다. 아, 이런 걸 브런치에 써야겠다 싶었다. 이건 그냥 인스타그램에 중얼거림으로 남길 만한 사고가 아니구나. 나는 지금 내가 마주한 미디어 상의 문화를 내 기존 연구의 틀 안에서 해석하려는 엄청난 작업을 하고 있는 거구나. 브런치 글쓰기와 논문 글쓰기의 차이를 고민하기보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내가 한 연구를 정리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졌던 학술적인 고민들을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브런치 글쓰기와 논문 글쓰기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잘 정리될 수 있다면, 그것이 문학교육 전공자이자 필자로서 내가 가진 책임일지도 모른다는 새삼스러운 생각을 했다.
당분간 연재될 글은, 내 석사학위논문에서 '환유'를 주제로 삼았던 맥락과 그와 관련해 위의 김원훈의 코미디가 시와 연결되는 지점에 대해서 정리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문장 또한, 논문 글쓰기와 브런치 글쓰기의 스펙트럼이 있다면 논문 글쓰기에 가까운 문장을 표현만 갈아끼운 문장이다. 일반적으로 논문에서는 '본 연구의 목적은'과 같이 시작하는 문장이 여기에 해당한다.) '당분간'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아마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 몇 편으로 끝날지 모르겠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그 과정에서 내 문장들은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브런치 글쓰기와 논문 글쓰기의 차이를 찾고, 그 사이를 향해 나아가지 않을까 기대해볼 뿐이다.
석사논문의 시작: 시를 이해하지 않는 교육을 떠올리다
사실 당시 나는 '이른바 난해시'들에 대해 쓰고자 했다. '이른바 난해시'란 그 정체는 모르겠지만 난해시라고 불리는 것들을 말했고, 나는 그들 시를 가르치는 교육에 대해 제안하고 싶었다. 국문학과 문학비평에서 그들의 난해함에 대해 사회문화적 의미를 부여하고 그리하여 난해함이란 어디서 오는가를 논하는 방식을 보면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렇다면 난해시의 개념을 정립하고 이론적으로 접근하기보다, 문학교육에서 실용적으로 접근해보자는 것이 첫걸음이었다. 아니 오히려 추상적인 수준에서 이해란 무엇인가, 해석이란 무엇인가, 어렵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식으로 개념적으로 접근해서는 답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문학교육에서 구체적인 사안들부터 해명해나간다면 그것이 반대로 이들 난해시에 접근하는 더 좋은 방법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른바 난해시라고 불리는 이 시들,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 그걸 위해 필요한 문학교육의 전제는 무엇인가. 이런 것들이 처음 논문 주제를 잡았던 초점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당시에는 '이른바 난해시'라고 했지만 거기에는 내가 생각하는 00년대에서 10년대 사이의 특정 시군들이 있었던 것 같다. 학교 문학교육을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생각하는 내가 쉽게 해석하지 못하는 당대시들. 어쩌면 그때 교육의 무용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이상하다, 학교에서 배웠던 시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학교에서 만났던 시와 그들은 (대체 어떤 면인지 모르겠지만) 전혀 달랐고, 학교에서 배웠던 시 읽기 방식으로 읽기에 그들의 시는 도대체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비유와 상징으로 점철되어 있어도, 이미지와 언술을 엮어 하나의 의미와 주제를 만들어갈 수 있는 게 시 읽기의 즐거움이자 의의라고 생각했는데.
지적 호기심이 발동했다고 하면 거짓말이리라. 나는 오기가 발동했다. 대체 이 '이해'되지 않는, 혹은 학교교육의 표현대로라면 '해석'되지 않는 시들은 무슨 즐거움으로 읽어야 하는가. 이 시를 쓴 사람들은 이 언술들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논리를 가지고 쓴 것인가. 정말 당시의 평가들처럼, 시인들이 "자폐적"이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생산하고 있는 것인가. (이때 '자폐적'은 자폐인에 대한 비하라기보다는, 정신의학적으로 자폐를 진단하는 기준인 언어의 비정상성이나 그로 말미암아 사회적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태로서 비유적으로 쓴 것으로 생각된다.) 나아가, 시교육에서 앞으로 이런 시들을 다루게 된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아니, 애초에 시교육이 시를 '해석하는' 교육이었던가. 그런 고민들이 꼬리를 물었다.
다행히도 비평계에서 이미 다양한 담론이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서정이라거나, 애초에 서정이 아니라거나, 자아가 아닌 주체로서 화자가 세상을 만나는 방식이라거나, 심상이나 은유가 아니라 감각이나 언어의 물질성이라거나, 의미가 아니라 무의미나 해체라거나, 실제 세계가 아니라 환상이라거나 하는 식이었다. 이들을 새로운 경향이라고 하며, '미래파'나 '뉴웨이브' 같은 이름들을 붙이고 이 명명에 대한 논란도 시끌시끌했다. 아 그렇다면 '해석'에 대한 강박을 가진 문학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문학의 출현일 뿐인 것일까. 그러면 새로운 문학의 출현을 문학교육에서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한다는 식으로 문제의식을 재설정해야 할 것인가.
문제는 근대시에서도 발견되는 유사한 경향들이었다. 당장 기억나는 걸로만 해도 이상이 그렇고, 김춘수가 그렇고, 김수영이 그렇고, 오규원이 그랬다. 하지만 이들의 시를 중고등학교 교과서나 문제집에서 만나는 일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들의 이름은 만나지만 이들의 '해석이 되지 않는' 시들은 교육에서 다루지 않았다. 물론 이들의 시 경향을 소위 '미래파'라는 00년대 시 경향과 동일시하는 것은 과하게 단순화(over-simplifying)하는 것이라고 비판받을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시교육의 중심적인 담론이 시의 '해석'이었고, 아니 해석이 아니더라도 독자가 시를 읽고 '반응'을 보인 뒤 이를 구조화하여 '의미를 구성'하는 것이라면, 이들 시들은 시교육에 들어올 수가 없는 종류라는 점에서 이들은 유사했다.
나는 지도교수님을 찾아뵙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런 시들이 왜 문학교육 담론에서는 배제되었을까요? 교수님의 정전 논의와 같은 맥락일까요? (지도교수님의 박사논문은 현대시교육의 정전과 관련된 내용으로, 현대시교육에서 정전이 선택될 때 특정 지배적 담론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일군의 시가 선택/배제되었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지 않나요? 학습자의 수준에 대한 교육적 고려였을까요? 어쩌면 교수자들의 교수가능성에 대한 임의적 선택은 아니었을까요? 당장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마주하게 되는 시들은 오히려 새로운 서정을 향해 가는데, 학교에서 전통적인 서정만을 수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근대시에서도 사실 이런 경향은 있었다는 것에서, 어쩌면 시를 서정으로서 읽는 방법밖에 알려주고 있지는 않을까요? 그말인즉슨, 우리 시교육이 치우쳐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치우쳐 있는 시교육의 결과로, 시인들의 담론은 더욱 첨예해지는 것과 반대로 일반 독자들의 시에 대한 인식은 단순해지고 있지는 않을까요?
물론 지도교수님께서는 논문 주제를 가져오라고 했더니 물음표만 한 보따리 싸매고 온 석사과정생에게 적절한 처방을 내리셨다. "그런 논문은 나도 평생을 가도 못 쓴다." 구체적인 문제의식과 작은 주제를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Down to earth"와 같은 표현을 들기도 하셨다. 오히려 초반의 질문에서 다시 시작해보자 하셨다. 이 시를 쓴 사람들은 이 언술들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논리를 가지고 쓴 것인가는 교수님께서도 궁금하다고 하셨다. 내가 가져간 근대의 시인들은 주로 시론과 시 창작을 함께 한 사람들이니, 그들의 시론을 들여다보는 것이 어떠냐 하셨다. 그리하여 여러 시론을 탐독하던 중에,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나는 '환유'라는 단어와 드디어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