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수업은 대체 언제 해방을 맞냐?“ 학부 시절 국문학사 수업에 대해 농담삼아 하던 이야기였다. 내가 그 수업을 들은 지 10년이 지났다. 여전히 국문학사 수업의 강의계획서에는 90년대 자본주의 시대까지 적혀 있지만, 10년째 암흑기에서 국어교육과의 국문학사는 끝을 맺는다. 처음에는 교수의 무능 혹은 과몰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면, ‘국어교육과’에서는 그 이후의 내용이 그리 중요치 않았다.
한국의 근대문학이 성립하고 성숙한 시기, 그 이후의 시들은 문학사라는 거대 담론으로부터 벗어나 교육적으로 재해석되고 재편되었다. 50년대 전후문학도, 7-80년대 민중문학도, 90년대 자본주의 시대의 문학도 모두 문학사보다는 한국사와의 연관성 속에 배치되었고, 몇몇 서정시들은 문학사적 맥락보다는 개인적 맥락에서 학습자에게 필요한 형태로 제공되었다.
문학교육은 국문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텍스트에 가치를 두는 경향이 있다. 오래된 것일수록 더 많은 후대의 사람이 경험하게 되고, 그로 인해 더 많은 해석과 이론이 생성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성된 지식들은 전승과 전수라는 형태로 교육에 활용된다. 하지만 문학교육은 또 현재를 지향한다. 교육을 받는 당사자, 즉 학습자는 현재에 살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의 텍스트는 현재에서 새로운 것으로 적용되고 되살아나야 한다. 그렇게 구성되는 지식들은 해석과 학습이라는 형태로 교육에 활용된다. 거창하게 적었지만 이를 나타내는 쉬운 말이 있다. 바로 ’온고지신‘이다.
2020년대의 국문학과 문화콘텐츠학은 온고와 지신의 두 갈래로 나뉜 것처럼 보인다. 국문학은 여전히 근대 문학을 중심으로 연구하며, 과거를 해석하고 그로부터 인간의 본질과 한국인의 특수성을 탐구한다. 한편 문화콘텐츠학은 새로운 매체에 적응하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여 인간의 여가를 책임지고 k-문화를 확산한다. 그 사이에 어디쯤, 문학교육이 설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문학교육을 생각할 때 문학교육은 아직 너무 ‘온고‘에 치우쳐 있다. 한국의 근대문학이 성립되고 문학이론과 비평이 넘쳐났던 해방 이전의 텍스트만 한 것이 없어서인지, 지식의 전수와 문화 전승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있기 때문인지, 학습자에 대한 고려가 더 필요한 것인지 그 이유는 결론 내리기 어렵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우리 교과서에 아무리 많은 대안 정전이 포함되었다 하더라도 그 안에서도 근대 문학에 대해 우리에게 인식론적 권위가 심겨 있다는 것이다. 2020년대 시인들은 시쓰기만으론 먹고살 수 없다고 토로하는데, 1920-30년대 시인들은 그들의 복각본이 베스트셀러에 연달아 오른다. 이런 현상에 문학교육이 일조하고 있다는 혐의를 내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내가 1저자로 참여한 논문들을 살펴보니, 나는 문학교육이라는 활동을 ’지신‘에 초점을 두고 재해석하고 싶은 것 같다. 문학 정전을 과감히 해체하여 독자가 스스로 상호텍스트적으로 의미를 구성해내는 것, <고등래퍼>에서 감행한 교과서 문학의 재해석과 전유는 학습자에게 맞도록 옛것을 다시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이다. 시 읽기 매개 텍스트는 옛것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새로 생산되는 현재의 것에 관심을 가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을 떠올린 것이었다. 또한 수필이라는 아주 현대적인 장르-지금은 대 에세이의 시대이므로-가 문학교육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듯한 현상에서 착안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것이 별로라고 생각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90년대 이후 시인들-기형도, 최승자, 진은영, 유형진 등이다-을 나의 최애 시인으로 꼽지만, 백석과 윤동주에게 애달픔을 느끼고 이상과 정지용에게 머리를 얻어맞는다. 만약 그런 시들을 후대의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고 하면 정말 화가 날 것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신’의 문학교육을 지향한다. 결국 문학은 과거에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우리에 의해 되살아나고, 과거에만 존재했던 유물이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해서 생산되고 유통되는 재미있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결국 오래된 것들을 새롭게 구성하는 역량적 측면과, 계속해서 문학 작품을 생산하고 수용하려는 태도적 측면과, 그리고 한국의 문학 문화를 활성화하려는 사회적 측면이라는 문학교육의 본질을 위해서 ‘온고’보다는 ‘지신’ 쪽에 더 방점이 찍힌 채로 그 사이 어디쯤 위치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