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윤희 Mar 22. 2023

취향의 발견과 문학교육에 대한 고민

나의 음악 취향을 한 단어로 발견한 날에 부쳐

전공자가 아닌 사람에게 문학이나 예술의 이론과 개념은 나의 취향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을 구글에 주르륵 검색해 봤다. 구글 검색에서 ‘정보’란이 별도로 나오는데, 위키백과 기반인 듯하다. 거기에 뭔지 잘 모르겠는 장르들이 나온다. 팝 록, 포크 록, 독립 음악, 블루스, 하우스 음악, 시부야계, 인디트로니카, 재즈 팝... 그중에 비교적 공통적으로 포함되는 것이 포크 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포크 록에 대해 검색해 봤지만 음악에 문외한인 나에게는 얼핏 감만 잡힐 뿐이다.

하지만 누군가 꽤 음악 장르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의 목록을 쭉 듣는다면, 그는 이런 검색 없이도 ‘아 포크 록 쪽을 좋아하시는군요’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보면 나의 취향에 언어를 부여해 주는 개념어(특히 전문용어 jargon)를 사용하는 것은 소통을 용이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시에 적용해 보자면 누군가 나에게 저는 백석, 김수영, 김언이 좋아요라고 한다면 나는 단번에 서사나 서술을 중심으로 한 시를 좋아한다고 생각할 것 같다. 그게 음악에 대해서 같은 것이 아닐까.

이렇게 소통이 용이해지면 (그런데 이게 알고리즘만큼 성능이 좋을지는 모르겠다) 내 취향에 맞는 다른 텍스트들을 추가로 만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내가 일상에서 노래를 듣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니(주로 차 안에서만 가능하다) 내 마음에 안 드는 노래까지 들어가면서 내 취향에 맞는 노래를 찾아 헤맬 필요가 적어지기 때문이다. 이건 시를 읽는 현대인에게도 중요하고 필요한 전략인데, 시를 전공하지 않고서 시 한 번 취미 삼아 읽어볼까 하는 사람들에게 시집은 너무나도 많고 그 시집 속에 시들도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사실 시 전공자도 다 못 읽는다...) 이렇게 보면, 문학 소비자를 기르는 교육을 염두에 둘 때 지금 국어과 문학 교육과정에서 가르치는 개념들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지 고민스럽다. 이는 물론 국어교육 내 문학교육의 목표가 미래의 문학 소비자/생산자 양성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기도 하지만. (문학교육의 목표를 이러한 실용적 목표로 재편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또 새로운 논증이 필요할 것이다.)


나아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공통된 성질을 구체적으로 알게 됨으로써 다시 개별적인 텍스트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 낸다. ‘포크 록’이라는 음악이 어떤 특징을 가지는지 알게 된 나는 개별 노래들에 대해서 단순히 ‘이 노래 좋다’라는 반응에서 한 단계 나아간 말들을 생산할 수 있다. ‘이 노래는 내가 좋아하는 다른 노래들처럼 사운드가 최소화되고 보컬이 강조되는데(이는 포크 음악의 특징이라고 한다), 중간중간 나오는 투박한 드럼 소리가 가사의 메시지를 살리는 것 같아서 더 좋네‘와 같은 식의 표현이 가능해진다. 이런 해석과 감상이 가능해지면 그 음악은 나에게 더 의미 있는 것이 되고, 아마 다음번에 비슷한 드럼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나의 귀는 더 섬세해질 것이다. 다시 예를 든다면 ‘지난번에 들었던 노래랑 비슷한 투박한 드럼 소리인데, 그 노래랑 달리 후렴이 아니라 벌스에서 드럼을 써서 다른 느낌을 주는구나’와 같은 식으로 소리 자체뿐만 아니라 음악 구성으로 확대되는 식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 개념어가 프레임이 될 때인데, 모든 프레임이 그렇듯 프레임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내가 구글 검색으로 찾아낸 공통점이 그 음악을 모두 규정하는 것이 아니며, 내 취향이 거기에 갇힌 것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열린 마음으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에서 찾아낸 공통점인 ‘포크 록’보다는 차이점들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할지 모른다. 10cm는 팝 록, 안예은은 블루스, 페퍼톤스는 인디트로니카, 선우정아는 재즈 팝. 이제 이 단계부터는 포크 록만 알면 되는 게 아니게 되니 꽤 고급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제 차이점에다가 내 프레임을 적용해 볼 수도 있겠다. 그러면 각 아티스트들에 더 가치가 부여된다. 지금 내 지식수준에서 이해가 되는 건 선우정아다. 내가 사랑하는 선우정아의 스캣이나 자유로운 키보드(신디) 선율을 떠올려보면, 아 그게 재즈적인 요소였구나 싶다. 그러면 선우정아의 노래에서 재즈적인 것, 록적인 것, 포크적인 것을 나누어보거나 찾으면서 듣는 것은 다시 앞서 얘기한 것처럼 나의 인식을 넓힐 수 있는 과정이 되리라.


이렇게 적다 보니 문학을 전공할 것이 아닌 사람들에게까지 문학을 가르쳐야 하는 당위를 매번 설명해 내야 하는 시대에, 왜라는 질문보다 어떻게를 강조하고 싶다. 문학 자체의 중요성보다는, 가르치는 내용과 방법을 바꾼다면 문학이 계속해서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음을 설득하며 살아야겠다 싶다. 타인에게 영향력을 끼친 많은 사람들의 시작점에 ‘이거 진짜 좋은데 제대로 설명을 못하겠네...’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다. 나도 내가 시에게 받았던 구원과 풍요를 계속해서 설명하고 설득하며 살아야겠다는 건방진 생각을 해볼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지신’의 문학교육을 지향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