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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오 Nov 13. 2021

백만 원 단위

인건비 계획의 늪

제조업에서 경기 악화와 품질불량 이슈 그리고 경쟁사와의 치킨게임은 꽤나 메인 악재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악재가 동시에 터지면 어떻게 될까?


매년 신년회마다 "창사 이래 최대 위기"라고 외치는 대표이사를 보면 일단 경기는 늘 안 좋은 것 같다.

설비 투자를 그렇게 하면서도 불량품이 계속 나오는 것은 신의 뜻인지 인간의 한계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늘 있는 일' 수준이었다. 세 번째 악재가 터지지 전까지는 말이다.


매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하이엔드 제품 수주에 있어서 경쟁에 밀려버렸다. 경쟁사에서 치킨게임에 들어갔고, 뒤늦게 따라갔지만 거래처는 경쟁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물량은 늘었지만 정작 돈이 되는 하이엔드 제품은 절반이나 줄었고, 만들어도 별로 남는 것도 없는 저가형 제품 물량만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경영진은 신경이 예민해졌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수익이 날 것인가 손해가 날 것인가를 보고 싶어 했다. 제조업에서 수익은 결국 수주 물량이다. 그리고 그 물량은 이미 경쟁사에 졌다. 그러면 결국 남는 것은 비용을 줄이는 것뿐이다. 제조업에서 비용이라고 하면 결국 재료비와 인건비다. 그런데 물건을 만들어야 하는데 재료를 줄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인사팀 입장에서는 '그럼 물건을 만들어야 하는데 사람을 줄이는 건 말이 되고?'라고 외치고 싶지만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마법의 문장이 있다. "너네는 돈 벌어오는 부서가 아니잖아."


어쨌든 이미 수주 싸움에서 진 이상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서 인원감축이 필요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제조업 생산직의 퇴사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인사팀에 채용 전담 파트가 있고 일주일에 3일은 하루 종일 면접을 봤다. 정말 '전국에 있는 인원을 싹싹 긁어모으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하루에 100명씩 총 300명을 뽑아서 입사시키면, 그 주에 어디선가 300명이 퇴사를 한다. 채용 파트가 밑 빠진 독에 물을 들이부어서 유지하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채용을 조절하면 인원감축은 저절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한 회사의 중추를 맡고 있고, 나름 회사생활도 오래 하고 똑똑하다고 스스로 자랑하는 경영진들은 의외로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몰랐다. 


물량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수익이 높은 하이엔드 제품 물량이 줄어들었다. 오히려 저가형 제품의 물량은 늘었다. 만들어봐야 돈이 안될 뿐 생산량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그러면 이 상황에서 사람을 줄이면 어떻게 될까? 남은 사람이 더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근로기준법은 더 일을 시키려면 1.5배의 가산수당을 주라고 하고 있다.


생산직 한 명에게 하루 인건비가 평균 1만 원이라고 치자. 그러면 직원이 2천 명일 때 하루 인건비는 2천만 원이다. 그런데 인건비를 절감한답시고 500명을 줄였다. 그러면 1.5천 명이니 인건비는 하루에 1.5천만 원일까?


아니다. 남은 1.5천 명이 2천 명이 하던 일을 해야 한다. 그만큼 추가 근무가 이루어진다. 연장근로, 휴일근로, 야간근로가 늘어난다. 물론 총인건비는 2천만 원보다는 줄어든다. 어쨌든 인원이 줄었으니까. 하지만 절대 1.5천만 원까지 줄어들지는 않는다. 남은 사람들만으로 물량을 소화하기 위해 그만큼 추가 근무를 해야 하니까.


그런데 경영진은 왜 사람이 줄었는데 인건비가 이거밖에 줄지 않았냐고 화를 낸다. 이해가 가지 않는단다.

'네가 멍청해서 그래'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럴 수야 있나. 차근히 설명해준다. 그러면 이제 변수(직원들의 추가 근무)를 너무 과도하게 잡은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해는 한다. 지금 만들어진 인건비 계획대로라면 마이너스가 나니까.


하지만 추가 근무를 시키지 않을 거니 1.5천만 원으로 바꿔오라고 하면 절대 못한다고 해야 한다. 당장 다음 달 인건비 실적은 하루 1.5천만 원이 아니라 1.6천만 원쯤 될 거니까. 하루 1천만 원이면 한 달 실적은 억 단위로 튄다. 그러면 그때 가서 모든 책임은 인사팀에 뒤집어 씌워진다. 인사팀이 인건비 계획을 잘못 짰다고.


그러다 보니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다양한 가정과 조건과 변수를 넣어 인건비 계획을 짜야한다. 경영진 입장에서는 계속 마이너스가 나니 위에 보고를 못하겠고, 인사팀 입장에서는 절대 그만큼 줄어들 리 없는 인건비를 줄어든다고 말할 수 없다. 


매번 새로운 가정과 조건과 변수가 지침으로 내려오고, 그에 맞추어 인건비 계획을 고친다. 위에서는 빨리 보고하라고 하고 밑에서는 복잡한 조건과 변수를 반영하고 있으니 경영지원본부장의 속은 타들어 간다.


마음이 급해진 경영지원본부장이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실적도 아니고 계획인데 무슨 원 단위까지 짜고 있어?
그냥 러프하게 백만 원 단위로 짜면 되잖아!

작성자 입장에서야 나쁠 것이 없다. 그 후로는 계속 백만 원 단위로 계획이 세워졌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보고서는 지금 47번째 버전이다. 

그리고 보고를 마치고 돌아온 경영지원본부장이 갑자기 이렇게 말한다.


이거 3분기 인건비 계획 이거 원 단위 얼마야?


오늘도 회사생활은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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