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나는 예수를 잘 모른다.
교회 성탄의 밤에 눈이 맞았던 아빠 엄마의 딸이었으니 어린 시절 일요일이면 자연스럽게 교회를 갔다. 가끔 집에 오신 할머니가 성경책을 읽어주신 평화로운 기억은 내 몸 한구석에 아련하게 남아있다. 반항심이 커진 중학교 시절에는 말도 안 되는 것을 믿는 척하기가 싫어서 교회를 떠났다. 어차피 불공평하고 악한 세상이라 여기며 별생각 없이 청년의 자유를 누렸다.
대학 졸업 후 다녔던 직장이 명동 성당에서 가까워 가끔 점심시간이면 복잡한 시내를 벗어나 이끌리듯 그곳으로 향했다. 어두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반짝이는 빛 속에 멍하니 앉아있다 보면, 몽롱해지거나 잠이 들 때도 있고 충만함으로 재충전해 일터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고요와 평온이 좋아 이후 교육을 받고 한참 성당을 다녔다. 결혼하고 다시 교회로 향하지만 기관이 설파하는 교리와 나의 믿음이 온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경계선에서 믿음과 불신을 오가면서도, 삶의 위기가 찾아오면 여지없이 신에게 매달렸다.
형식적인 신자였던 내가 성경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미술로 만나는 구약의 사람들>에서 언급한 것처럼, 팬데믹 시기에 산책에서 신과 대화하며 내 마음속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후 <미술로 읽는 성경 이야기: 미술가는 성경을 어떻게 번역해 왔는가>를 강의하면서 구약에 홀랑 마음을 빼앗겼다. 많은 인물과 극적인 이야기로 가득 찬 데다가 구약의 성화를 접해볼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강의에 오신 분들도 더 재미있게 바라보셨다.
브런치도 그 내용을 정리하고 싶어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쓰다 보니 너무 힘이 들어가고 부족함도 느껴져서 예전부터 마음에 있었던 다른 주제들을 펼쳐 보았다. 새해에 하고 싶은 것을 써 내려가는데 구약을 마무리하기 전에 먼저 예수를 만나라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그림으로 따라가는 예수의 발자취> 매거진을 만들고 신약을 읽기 시작했다. 솔직히 규칙적으로 읽지 못해 이 시리즈를 시작한다.
성화는 대부분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예수를 주인공으로 한다. 그 가운데서도 신앙을 함축한 신의 육화, 즉 그리스도의 탄생과 함께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 처형, 부활이 가장 많이 다루어져 왔다. 이런 성화나 조각은 여행에서 만나는 유럽의 성당이나 미술관에서뿐만 아니라 미술사나 성화 관련 책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태고지(처녀 마리아가 성령을 통해 잉태할 것을 알린 것)가 수도 없이 제작된 것이나 예수의 수난이 더 고통스럽게, 부활은 더 찬란하게 묘사된 것은 교회와 사회, 개인의 여러 요구와 욕구가 복잡하게 맞물려 있다.
그런데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청년 예수의 행적이다.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의 삶을 면밀히 살피고 본받아야 할 터이니 말이다. 나로서는 ‘그림을 통해’ 이천 년 전 예수가 이 땅에서 누구와 함께 어디를 다니며 무슨 일을 하고 어떤 말을 했는지 깊이 묵상하고 싶었다. 예수의 공생애는 극적인 몇몇 사건을 제외하고 많이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강의를 준비하면서 새롭고 흥미로운 작품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예수의 탄생과 죽음, 부활의 내용도 추가하겠지만, 먼저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