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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른아이 Jan 12. 2022

틀림과 다름은, 틀림이 아닌 다름이기에


“학벌? 그게 무슨 소용이고. 다 필요 없다. 그런 거”


중, 고등학교를 함께 보내며 힘들 때나 어려울 때 서로에게 힘이 되어줬던 절친한 친구 5명이 사회에 나오고 처음으로 다 같이 모인 저녁 자리에서였다.


1년 만에 만나 그동안 못다 한 얘기를 나누다 우연히 고등학교 시절 성적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치지 않은 친구 B에 대한 학업 이야기로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을 때 친구 A가 불쑥 비아냥이 섞인 말을 내뱉은 것이다.


무심코 새어 나온 그의 날 선 말은 나와 다른 친구들을 벙찌게 만들었고 한동안 무안해진 상태로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을 때 A는 모난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너희 공부 잘해서 뭐 대기업 들어간 거 말고 더 있나?

그래 봐야 다 월급쟁이지”


옛날 같았으면 모순으로 가득 찬 그의 주장에 즉각 반론을 펼쳤던 나였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홀로 씁쓸한 술 한잔을 삼키는 것으로 그에 대한 반론을 대신하고 있었다.


잃지 않으려 마음 한구석에서 그를 꼭 움켜쥐고 있던 내 손은 그렇게 느슨해져만 갔다.


그를 옛날 한없이 순수했던 때로 돌릴 수만 있다면…






A와는 유치원 때부터 친구였다. 항상 유쾌하고 밝은 기운을 가져다줬던 그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어른들에게도 싹싹하게 잘했던 그는 친구들 집에 놀러 가기라도 하면 그 집 식구들이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개성 있고 총명한, 그런 아이였다. 학업도 우수하여 대학에 입학한 후로도 화학공학과 경영학을 복수 전공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대외활동을 이어나가며 수많은 경험을 쌓았다.


시간이 이대로만 흐르면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 것만 같던 그에게, 문제의 시련은 대학교 4학년이 되던 해 불현듯 찾아왔다. 조선소에서 용접공으로 일하시던 그의 아버지가 이른 아침 출근길에 뇌출혈로 쓰러진 것이다.


큰일을 겪은 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테지만 여러 차례에 걸친 수술과 장기간의 입원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병원비는 그를 더욱더 힘들게 만들었다.


결국 그는 그토록 좋아하던 대외활동뿐만 아니라 학업까지 중단하기에 이르렀고 낮에는 아버지 간병을,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부족한 병원비를 보탰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행히 아버지의 상태는 조금씩 호전되어 갔지만 장기간 간병 생활로 많이 지친 탓일까, 그의 마음은 예전과 다르게 병들어 가고 있었다.


"아버지 좀 괜찮으셔?"

"이제는 좀 낫다. 근데 의사 병X새끼들 하나도 도움안된다. 멍청한놈들”


처음에는 '얼마나 힘들면 저럴까’싶어 왠지모를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흘러 아버지가 쾌차하여 퇴원한 후에도 그의 삐뚫한 시선은 달라지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OOO 걔는 아직도 재수한다더라 에휴..”


“니 아직도 OOO 만나나? 별 볼일 없을 것 같은데..”


“이 동네 답이없다. 못배운 사람들 밖에 없어서”



그와 나는 걸어서 5분도 안걸리는 동네에 살아 조금이라도 시간이 날 때면 근처 놀이터에서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누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와 대화를 하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졸업을 하고나서도, 사회인이 돼도, 답답함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니 아직 걔랑 사귀나? 더 능력있는 여자 많잖아”


“요즘 부동산 투자 안하면 병X이지”


어렸을 때는 누구와 의견충돌이 발생하거나 갈등이 발생할때면 순백의 미소를 띠며 상대의 다름을 가장 먼저 존중해주던 그였지만, 애석하게도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그에게 이 세상은 다름은 존재하지 않는, 틀림만이 존재하는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때와 지금, 그는 독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누구보다도 더 치열하게 살아가고 중이다. 중견기업에 입사하고 부동산으로 큰 성공을 거두어 이른 나이에 풍족한 삶을 이뤄냈다.


어쩌면 그것은 그에게 가장 큰 시련이었을 그 날의 기억이 만들어낸 결과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상으로  계단  계단 발을 내딛을수록 마음의 풍요로움은 메말라가는 그를 바라보며, 어지럽혀진 내 생각과 마음을 다시금 추스려본다.



누군가는 꿈을 이루기 위해 몇 년의 시간을 인내하는 것이고,


누군가는 순수한 관계 그 자체만이 관계의 목적이 되는 것이고,


누군가는 부족한 배움을 지혜로움으로 채워나가는 삶을 꿈꾸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뜨거운 사랑을 하는 중일 것이며,


누군가는 물질로도 살 수 없을 행복을 이미 가진 사람 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의 삶은 틀림이 아닌 다름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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