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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른아이 Jan 19. 2022

대출받아 여행갑니다

'풀려라오천만 풀려라피로, OOO로 산다는 것'


피로회복제 홍보를 위해 사용되었던 한 광고 카피다. 30초 남짓의 영상이 공감과 감동을 안겨주는 드라마가 될 수 있다면, 2013년 3월에 나온 이 광고는 가히 내 인생 최고의 '드라마'로 꼽힌다.


두 명의 직장인이 포장마차에서 힘든 사회생활을 토로하는 Scene으로 시작되는 영상은


그 Scene을 누워서 바라보는 한 백수에게 전달되어 직장인에 대한 부러움을 보이고,


그 모습은 다시 군대 이등병에게 전달되어 TV를 누워서 볼 수 있는 백수에 대한 부러움을,


그 모습은 또다시 두 명의 직장인에게 전달되어 젊음을 가진 이등병에 대한 부러움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만의 피로가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짧은 영상이었지만, 나는 마지막 Scene에서 군시절을 그리워하는 직장인의 아련한 모습을 통해 ‘시간이 흐르면 지난날을 그리워한다’는 조금 다른 의미를 찾게 되었다.


짙은 여운을 주는 이 광고가 각종 매체를 타고 흘러나올 때, 나는 스물셋, 그러니까 이등병과 백수의 중간 즈음 되는 나이를 지나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대학생 때까지 선생님이나 대학 선배들로부터 인생에 대한 조언을 많이 듣곤 했다.


"공부할 때가 제일 좋은 때다. 선생님 나이 돼봐, 걱정이 더 많아져"


"놀 수 있을 때 많이 놀아. 취업하고부터는 놀 시간이 없어"


스스로 세운 기준이 있는 부분에서는 고집스러우리만큼 남 얘기를 따르지 않는 나였지만, 인생에서 저 먼발치 앞서 있던 그들의 인생 조언은 몇 번이고 새겨들었다.


당장에 지난날을 돌이켜보더라도 그들의 격언에 공감할만한 일들로 넘쳐났다. 부족한 기초를 따라잡으려 하루 15시간이 넘게 공부하며 지난날을 후회했던 수험생 시절, 넘쳐나는 부조리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기에 급급했던 군 시절 모두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보면 고통은 사라지고 아쉬움만이 남겨진 시간들로 기억된다.



‘왜 그땐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그 당시 23살 복학생이었던 나에게도 스트레스, 취업 불안 등 수많은 현실적 고민들이 뒤엉켜있었지만, 그것 역시 지나고 보면 아쉬움만 짙게 남겨질 것만 같았다.



'직장인이 되면 나는 무엇을 가장 후회하고 있을까?'



어느 순간 뿌리를 내린 이 물음표는 한동안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고, 오랜 시간 생각을 거치며 도달하게 된 결론은 ‘여행을 다니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였다.


물론, 여행은 직장인이 되어서도 휴가를 통해 다녀올 수 있는 것이었지만 여기서의 여행은 조금 다른 의미의 여행이었다. 즉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떠날 수 있는 그리고 어린 나이에 느낄 수 있는 생각과 경험 속에서 할 수 있는 그런 여행 말이다.


더욱이 돈은 충분하지만 시간이 부족한 직장인을 떠올려본다면 직장인이 되고 느끼게 될 갈증은 너무나 자명해 보였다.


‘더 늦기 전에 떠나자’






용돈을 받지 않고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로 한 달을 간신히 버티던 내게 해외여행은 엄두조차 내기 힘든 일이었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출’



사실 어린 나이에 대출을 하는 것은 명보다는 암, 득보다는 실이 큰 위험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젊음이었기에 취업 시점과 예상 월 소득을 바탕으로 상환 기간을 계산하여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실행하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학기마다 생활비 대출을 받으며 호주 워킹홀리데이부터 유럽, 일본, 대만, 태국, 필리핀 여행까지 각국을 돌아다니게 되었다.


1년간 호주에서 지내며 한없이 느긋하고 관대한 그들의 정서를 통해 경쟁 속에 지친 심신을 위안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는 아름다운 건축물과 도시의 풍경을 경험하며 마음의 풍요를, 일본과 대만에서는 성숙한 시민들을 통해 부족한 내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많은 외국인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부족한 영어 실력도 자연스럽게 향상되었고, 여행 도중 휴대폰을 잃어버려 며칠을 지도하나에 의지하여 돌아다닌 경험은 어디 내놔도 굶어 죽지 않을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이외에도 세계 각지의 사람들과 연을 맺고, 문화적으로 다른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사고의 폭을 넓히며, 여행 속에 마주하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내면을 더 성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여행 덕분이다.






현재 나는 여행이 가져다준 선물로 만족스러운 직장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영어 회의를 부족하지만 큰 불편함 없이 해내고 있고,

어려운 일이 주어져도 ‘여행하면서 그것도 했는데!’하는 해병대 못지않은 자신감으로 수행해 내고 있다.

또 누군가는 번아웃이 올 때 나는 ‘대학생 때 그렇게 놀았으면 됐지..’하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1,000만 원 가까이 되던 대출은 계획한 대로 취업 직후 4개월 만에 다 상환하고 현재는 열심히 돈을 저축하고 있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은 잔인하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현재를 살아내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지난날을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준 그때의 여행처럼, 앞으로의 내가 후회하지 않도록 글 쓰는데 힘을 더 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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