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슬슬 LP를 꺼내 들어보자. LP는 한 손에 쥘 만한 두께와 무게이며 두 손으로 들 때도 적절하게 물성과 양감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한 손으로 들기 어려울 만큼 묵직한 건 아니고 가뿐하게 이리저리 다룰 수 있다.
고가의 예술품이 아니라 적당히 함부로 해도 된다. 보호용 필름을 벗기고, 최대한 트랙 내에는 손자국이 남지 않도록 양손 날로 LP판을 든다.
조심스럽게 홈에 맞게 도킹시킨 후, 바늘을 들어 가장자리에 위치시키고 턴테이블이 돌아갈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이 LP를 재생하는 전부다.
달칵하고 카트리지가 작동하는 소리.
도도하게 흘러가는 플라스틱과 바늘의 마찰음.
바늘이 판에 닿고 나서 잠시간의 고요함.
이따금씩 들려오는 따스한 잡음, 판이 튀는 소리.
곡과 곡 사이에 이어지는 부드러운 고독.
비닐과 바늘이 맞닿는 것이 리듬과 멜로디로 내 귀에 닿게 된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음악 들려주는 기계'가 돌아가며 발생되는 모든 소리가 하찮지만 또 소중하게 느껴진다.
반면 디지털로 된 음악 앱은 어떠한가. 음악이 끝나는 그 잠시의 틈을 참지 못하고 다음 곡을 재생한다. 멸균실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흐트러짐 없는 0과 1의 소리들이 귀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말이 나온 김에 음악 앱에 대한 나의 불만을 이야기해보면, 그것은 편리해서 차라리 심기를 거스른다. 손가락만 몇 번 움직이면 시루떡 같은 만원 열차에서도, 해변에 누워 야자 주스를 마셔도,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멜론 탑 100을 내 귀에 꽂히게 만들 수 있다.
그뿐인가. 어떻게들 아는지, 몇 번만 재생을 돌리고 나면 취향에 꼭 맞는 음악들이 무한으로 추천된다. 나도 모르는 내 취향이 발견되거나 심지어 만들어진다 (너라면 이런 노래를 좋아할 거야!)
"샤잠"이라는 앱을 이용하면 지금 길거리에서 들리는 음악의 제목을 5초 만에 알 수 있다. 지금 '베를린' 에서 세 번째로 인기 있는 음악을 손쉽게 알 수 있기도 하다 (알아야 하는 걸까.?)
솔직히 음악을 찾고 듣는 행위가 이렇게 까지 되어야 할지 모르겠다. 분에 넘칠 만큼 감사하고 황송한 변화이나 음악을 세심하게 '고르는 나' 보다 알고리즘에 '종속된 나'는 어쩐지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모든 기술은 조금 더 몸을 움직이지 않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과거에는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부러 시간을 내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과거엔 아예 '음악감상실'이라는 본격적인 오프라인 공간이 있었고, 들을 수 있는 매체는 TV와 라디오뿐이었다.
그래서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면 시간에 맞춰 기다리기도 했다. 라디오를 듣다가, 노래가 나오면 재빨리 카세프 테이프를 넣고 녹음 버튼을 눌러야 했다. 길거리에서 들리는 좋은 음악을 흥얼거리며 집을 와도 그 곡을 알 길은 없었다.
조금 커서는 인터넷이라는 전 세계를 이어주는 도구가 생겨 음악을 좀 더 적극적으로 찾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심야 라디오를 듣다가 귀에 스쳐가는 노래들을 적어 두었다가 소리바다나 WINMAX을 몇 시간 동안 서칭 하기도 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유희열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feat. 올댓 뮤직)을 듣었는데 그때 일본 시부야계 음악을 주로 추천해 주곤 했었다. Havard의 clean&dirty를 다운로드하기 위해 p2p 사이트를 얼마나 헤매었던지...)
어린 왕자에는 " 네 장미를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너의 장미에게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라는 말이 나온다. 내가 무언가에게 애정을 느끼고 대상에게 쏟아주고 싶다면, 그것의 등가교환은 대충 퉁쳐진 9,900원짜리의 월 이용권이 아니라, 더 많은 비용과 긴 시간이 투여되어야 할 것이다.
내 추억이 담긴 특별한 곡에 겨우 좋아요를 누르거나 플레이리스트에 담는 것 만으로는 어쩐지 충분치 않다. 플레이리스트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으로 차려진 뷔페 한상이나, 내 테이블로 가져와 보면 뒤죽박죽 비빔밥 같은 느낌이 되기도 한다
인류 역사상 음악 듣기가 최고로 편한 요즘, LP는 굳이 수고로움을 동반한다. 먼지 쌓인 LP샵에서 음반을 뒤져야 하고, 몸을 일으켜 턴테이블을 작동시키며 LP의 한 면이 다 돌면 뒤집어줘야 하기도 한다.(솔직히 이게 제일 귀찮다)
그럼에도 LP를 듣는다는 것은, 남들이 월 9,900원, 한곡에 100원도 채 되지 않은 가격으로 값을 치를 때 나는 음악을 만든 사람들에게 심적으로 가깝게 돈을 지불한다는 사소한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서 이다. '이런 귀한 것을 무료에 가까운 돈으로 들어도 될까' 라는 부채의식도 떨치고 싶기 때문이다.
가치를 얻기 위해서는 어찌 됐든 노동이 필요하지 않나. 사자나 기린을 보고 싶으면 동물원에 가야 하고, 한 나라의 역사와 전통을 보고 싶다면 박물관에 가야 한다. 음악을 듣고 싶다면, 몸을 움직여 턴테이블을 작동시키는 정도의 공수를 하는 것이 옳은 방향의 소비이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