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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얀 Nov 19. 2021

한눈파는 인간

소설 쓴다고 설치다가 카피라이터 된 인간

 나를 뭐라고 소개하면 좋을지 생각하다가 글쓰기를 미루는 나를 발견했고, 요즘 여기저기서 보이는 ‘게으른 완벽주의자’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러나 자기를 소개하는 데에도 꼭 이렇게 남의 언어를 빌려야 하는지 자괴감이 들었고 나는 게으른 사람도 완벽주의자도 아닌 그냥 슬픈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는 정해진 자기 자신이 없는 사람이다. 불과 몇 년 전에 썼던 글을 읽으면 기억도 안 나는 사건과 감상이 적혀있고 그 글을 쓴 나와 지금의 내가 완전히 단절된 것처럼 느껴진다. ‘너 예전에 이랬잖아’ 이 말만큼 나에게 공포스러운 말이 없다. 잘 설계된 실험도 반복했을 때 동일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흐트러진 몸에 너덜너덜한 마음이라는 조건을 붙들고 어떻게 그런 무조건적인 말을 믿으라는 건지. 시간에 따른 단절을 차치하더라도 나는 어떤 사람 앞에 있느냐 에 따라 너무나 다르게 행동한다. 공과 사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조차 나의 성격을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것일까, 알고 싶지 않은 것일까? 둘 다 아닌 것 같다. 


 나는 정의되기 싫어하는 사람이다. 심리학을 전공했음에도, MBTI에 과몰입한다는 INFP임에도, 한국인들이 MBTI를 소비하는 방식을 보면 반사적으로 거부감이 든다. 혈액형별 성격 유형에서 조금도 진화하지 못한 방식이다. 사람들은 이 검사의 정확도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같거나 다른 성격 유형의 틀 안에서 느끼는 소속감을 숭배한다. 자신을 표현해줄 단어가 하나 더 생기면 쓸 데도 많고 마음이 편안한 것이 사실이나 기어이 획득한 단어 안에 갇혀버린다면 그건 너무 슬플 것이다. 차라리 이름 없는 아이가 되어 길을 헤매는 편이 훨씬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정해진 것도 없고, 그렇다고 정해주겠다니 싫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면 무엇이 나를  만드는지, 나를 관통하는 불변의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본다. 나는 어려서부터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에게 보여주는 글’이 쓰고 싶었다. 초등학교 때는 말도 안 되는 소설을 공책에 써서 친구들에게 돌려가며 읽게 했다. 학창 시절 내내 언젠간 등단을 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고 대학교에 진학해서는 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모여 소설을 쓰고 합평을 했다. 남이 나의 글을 읽고 반응해주면 살아있음을 느꼈다. 예를 들어, 내 소설 속에  아주 맛있는 떡볶이가 등장해 그 대목을 읽고 독자가 떡볶이를 시켜 먹는다면 그걸로 행복, 뭐 이런 느낌이다. 일종의 관종 같은 성향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등단은 언젠간 하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을 품은 채 카피라이터로 취업을 했다. ‘글’을 쓰면서 월급 따박따박 받는 안정적인 직업이고 이름 자체가 멋있으므로 지원을 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쓴 카피를 남의 돈으로 전 국민에게 송출한다는 점이 굉장히 짜릿하다고 느껴졌다. 입사 후에 선배들에게 등단 준비를 잠깐 했다고 말을 하니 모두가 ‘카피와 소설은 문법이 다르다’며 경고 같은 조언을 했다. 카피는 매우 집약적이고 논리적이어야 하는 데에 반해 소설은 호흡이 길고 끌어 가는 지구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 요지다. 4년 동안 카피라이팅을 하며 소설의 문법에 익숙해져 있었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여곡절은 많았다. 그러나 정작 날이 갈수록 깨닫는 것은 소설과 카피의 공통점이었다. 


 남이 읽고 반응하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흔히들 말하는 ‘인사이트’가 필요하다. 인사이트란 낯설게 와닿는 공감대라고 할 수 있다. 인사이트가 있는 카피란 익숙한 언어로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새롭게 환기해주는 카피다. 소비자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지점을 짚어주어 집중도를 높이고 서비스나 제품의 가치와 연결하면 대중에게 먹히는 광고가 탄생한다. 카피는 쓰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는 어떤 선배의 말씀을 요새 자주 떠올린다. 가장 일상적인 말로 가장 낯선 이야기를, 그것도 15초 이내로 써낸다는 쾌감, 그것은 내 카피가 TV나 유튜브에서 송출된 뒤에 느끼는 하이퍼-관종적인 쾌감과는 질적으로 다른 ‘발견의 쾌감’이다. 


 소설에도 인사이트가 필요하다. 있을 법한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끌고 가면서도 정치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현실을 정교하게 반영하면서 낯선 지점을 건드려줘야 하는데, 그 지점에서 인사이트가 들어간다. 대학교 때만 해도 글감은 주변에서 찾는 것이 맞지만 소설이라는 작품 자체는 작가의 필력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다른 장르의 글을 쓰고 나서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필력보다는 발견할 줄 아는 힘이 필요하다. 현실의 인물들에서 인간됨의 정수를 추출해 특정 인물로 재탄생시켜 짧으면 30분 길면 며칠 동안 읽을 수 있는 사건 안에 배치해야 하는 것이다. 


 인사이트는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눈파는 인간들에게 영감의 신이 내리는 축복이다. 찾는다는 말은 잃어버린 것을 찾을 때나 쓰는 말이고, 발견은 아르키메데스나 뉴턴의 일화처럼 약간의 우연이 가미된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다가 좋은 글감이 보이면 잊지 않고 카피나 소설에 써야겠다고 다짐한다. 그 다짐들이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관통하고 있는 것 같다. 덕분에 많지는 않지만 남들이 읽어줄 만한 글을 썼다. 나는 관종이기 전에 한눈을 잘 파는 인간일지도 모른다.  


 앞서 말한 정해진 것도 없고 정해지는 것도 싫어하는 나의 성향을 다시 생각해본다. 나는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을 그런 눈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특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가능성을 열어놓는 일이다. 함부로 내리는 정의가 얼마나 위험한지 생각하는 일이다. 언어의 한계를 경계하면서도 언어를 너무나 사랑하는 일이다. 적확한 단어가 없다고 믿으면서도 그것을 발견하면 기뻐 날뛰는 일이다. 감정의 롤러코스터에 자주 휩쓸려도 놓칠 수 없는 풍경에 한눈파는 일이다. 나는 갇혀있고 싶지 않다. 편견이든 좁은 식견이든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해 무언가를 놓치고 싶지 않다. 어쩔 때는 답이 없는 고민에 괴로워하다가도 그 끝에 뭐라도 발견하는 일이 남이 만든 언어에 매몰되는 일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다 잘하고 싶고, 사실 마음 깊은 구석에서는 이렇게 한눈을 잘 파니까 글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감히 생각한다. 


 이렇게 한눈팔다 보면 언젠가는 아주 대단한 것 하나쯤 발견하겠지,

 여력이 된다면 그것에 대한 글을 쓸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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