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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얀 Dec 07. 2021

죽고 싶은 마음을 희석하기

죽음이 글을 추동하는 두 가지 방식

예리하게


 괴로울 때면 종종 글이 쓰고 싶어진다. 글을 쓰는 시간만큼은 나의 생이 한없이 지연되어 응축된 감정이 묽어지는 느낌이 든다. 콱 죽어버려야겠다는 도끼 같은 다짐도 글을 쓰고 나면 어쩐 일인지 그 사나운 속성을 잃고 만다.

 그치만 글을 쓰는 일은 너무 괴롭다. 너무 많은 '나'와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낯설다. 밉다. 혹은 증오스럽기도 하고, 싸운 적도 없는데 화해부터 해야 한다. 먼저 말을 걸기 어렵다. 무시하고, 흘기고, 피하고 싶다. 이런 사람을 누가 반기랴.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기로 각오한 후에야 비로소 글쓰기가 시작된다.

 많은 사람들은 '나'를 대하는 소모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에 익숙하다. 폭음, 폭식, 폭주, 뭔가 폭발하는 일이 잦은데, 그런 방식들은 '나'를 속박해놓고 삿대질한다. 그 어떤 타인에게도 발현된 적이 없는 잔혹함이 자기 자신을 향한다. 스스로의 도발에 못 이겨 감정의 압력이 순식간에 올라갔다가 떨어질 때, 우리는 마땅히 해소해야 할 것을 해소했다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반면 글쓰기는 오열하는 '나'를 가만히 지켜봐준다. 눈물이든 오물이든 쏟아내면 쏟아내는 대로 놔두며 평가하지 않는다. 글쓴이로 하여금 자신의 신체로부터 이탈해 그것을 부감에서 내려다볼 수 있게 해 준다. 토해놓은 것은 아마도 감정의 잔해, 아마도 맞추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흩뿌려진 것을 본 이상 사람이라면 도로 맞춰보고 싶기 마련이다. 글을 쓰고 퇴고를 한다. 문장 성분이 결여된 채 목적 없이 쏟아지기만 하던 질문들이 점차 잦아든다.

 백지를 보면 대뜸 겁이 난다. 자기 몸과 마음에는 서슴없이 상처를 입히면서 고작 흰 표면이 뭐 그리 고결하게 보이는지. 우리가 찢을 것은 종이, 부술 것은 자판이다. 그렇게 오열을 하자.




둔하게


 요새는 동요가 없는 날에도 죽고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너무 행복해서 죽어도 좋은 그런 충만한 상태는 아니다. 그렇다고 "뭐가 <죽고 싶어>야~"라는 소리로 괜히 위안을 듣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냥 생에 의미를 부여하기 너무 지쳐버린 탓이다. 죽음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음. 이대로 죽어도 아무 상관없을 상태.

 이런 둔탁한 류의 죽음충동에 한참 얽매여 있으면 갑자기 삶이 나에게 장난을 치기 시작한다. 가방 앞주머니에서 두 달 전 구매하고 잊고 있었던 로또를 발견하여 확인해보니 오천 원에 당첨되어있다. 친구에게 대뜸 연락이 와 '주 3일만 영업하는 유명한 파이집에 오픈 한 시간 전부터 줄 서 있는 중인데, 먹고 싶은 파이가 있으면 말하라'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면 거절 않고 해당 가게의 후기를 뒤적거리며 먹고 싶은 파이를 -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 것 하나 그리고 단짠으로 조화로운 것 하나, 이렇게 나름의 밸런스를 맞춰서 - 두 개 골라 친구에게 알려주고, 그 파이를 받으러 가는 길에 로또 좌판에 들러 당첨된 로또를 다시 자동 다섯 개로 교환한다.

 지하철 시간을 확인하고, 열차와 승강장 간격에 빠지지 않게 조심하고, 계단을 올라 바람과 볕을 느끼고, '자동 다섯 개요'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고, 약속한 장소에서 친구가 친히 사 온 올스파이스 애플파이와 체다치즈 애플파이를 받아들고, 집에 돌아와 하나는 우유와 함께 먹고, 하나는 냉동실에 넣어두면... 그 때 비로소 깨닫는다. 삶의 장난에 휘말렸구나.

 이렇게 삶이 나에게 장난을  때… 장단  맞춰주고 하다보면 죽음휘적휘적 나를 피해 간다. 그럼 그 장난이 얼마나 헐겁고 웃겼는지, 덕분에 얼마동안 죽음을 잊을  있었는지 글로 길 수 밖에 없다. 이번엔  끝맺을  있겠지 하고 뱅뱅 돌려 삶의 뚜껑을 닫는데 나선에서 살짝 어긋나버려  닫힌 …. 물론 언젠가 제대로 닫아버림으로써 생을 마감하겠지만삐딱하게 끼인 꼴이 너무 우스워 기록으로 남길 수밖에 없다.

 오늘도 백지는 마치 멀뚱한 죽음처럼 나를 노려본다. 그 위에 글을 다 쓰고 나면 삶이 죽음을 비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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