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어날 수 없는 아픔과 함께 살아가기
‘그’ 일이 있고 난 뒤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나눠야 할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드라이브 마이 카 (2021, 일본, 2시간 59분)
무라카미 하루키 <드라이브 마이 카> 원작
제 74회 칸 영화제 각본상
제 94회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 영화상
“배우이자 연출가인 가후쿠와 그의 아내이자 극작가인 오토. 가후쿠는 운전을 할 때마다 오토가 녹음해 준 <바냐 아저씨> 대본을 카세트로 들으며 ‘바냐’의 대사를 익힌다. 그러던 중 가후쿠는 오토의 외도를 목격하게 되고 늘 그랬던 것처럼 모른척 덮어둔다. 어느 날 오토가 갑자기 사망해버리고 가후쿠는 더이상 ‘바냐‘ 연기를 할 수 없게 된다. 수년이 흐른 뒤 가후쿠는 배우가 아닌 총괄 연출가로서 히로시마 연극제에서 <바냐 아저씨>를 무대에 올리게 된다. 카후쿠는 그 곳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배우들과 자신의 차를 운전하게 될 젊은 운전사 미사키를 만난다.”
*약스포 포함
살다보면 꼭 내 이야기 같은 글을 종종 만나게 된다. 모든 이들에겐 이야기를 낳고 기르는 힘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읽고 쓰고 해석하고 씹고 뜯고 찢고 다시 깁고 자신이 이해한 언어로 말한다. 그 과정에서 지리멸렬 해보였던 인간 관계 사이에 모종의 공명이 일어난다.
이 영화는 상실을 겪은 사람들이 공통된 이야기를 소화하며 우연과 필연을 통해 다시 자신의 언어로 발화해내는 이야기다. 즉 상실 후의 삶, 그리고 언어/텍스트/이야기 대한 메타적인 이야기, 이렇게 두 가지(혹은 그보다 많은)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된다. 이 조밀한 짜임을 보니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엄청 변태인 게 분명하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대놓고 말하고 있다. 당신이 겪었던 ‘그’ 일에 대해 얘기해보자고. 반드시 잘 살 필요는 없다고. 그냥 힘들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먼훗날 죽어서 신 앞에 가서 우리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뢰면 된다고. 그럼 된 거라고. 아픔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했을 때, 정지해있던 몸이 비로소 움직여, 역설적이게도 그 곳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위로를 얻고 싶은 당신에게 추천한다.
런닝타임은 3시간. 보는 동안에는 시간이 꽤나 더디게 간다고 생각했는데 다 보고 나니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돌아볼 때 훨씬 좋은 영화였다. 지루해 죽을 것 같더라도 추억하면 참 찰나인 우리 인생이랑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영화를 통해 또 다른 삶을 살고 나온 느낌이었다. 문학이나 영화가 나를 되살린다는 감각을 느낄 때가 있다. 독자와 시청자는 자신의 굳은 몸에 이야기를 불어넣어 몸이 다시 생동하도록 하고 그것을 삶이라는 각자의 무대에 올리는 배우가 된다. 그러니 작가란 이야기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존재라기보다 그 이야기가 어느 몸뚱이에 가서든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텍스트의 형태로 잘 놓아주는 사람에 가깝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이 작품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실타래처럼 얽혀있다. 첫째는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 둘째는 오토가 구술하는 <야마가를 사랑한 여고생 이야기>, 셋째는 가후쿠를 필두로 한 이 영화 그러니까 <드라이브 마이 카>다. 인물들은 이 세 가지 이야기를 자신만의 언어로 섭취하고, 토하고, 경험으로 소화하거나 은유로 가려버리는 일을 반복한다. 그리고 하마구치 류스케는 영화적 실험을 통해 인물들의 소통을 이끈다. 마치 서로 다른 모국어를 지닌 화자들이 각자의 언어로 연극을 이뤄내는 가후쿠 연출 <바냐 아저씨>처럼.
영화 제목이 왜 <드라이브 마이 카>인가. 그건 주인공 가후쿠와 그의 운전사인 미사키의 관계에서 나온다. 가후쿠와 미사키는 각자의 상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게 앞으로도 꾸준히 살아가기를 청유한다. 고용인과 고용주에 지나지 않았던 이 둘 사이에 마법같은 작용이 일어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Drive my car는 명령조가 아닌 청유조로 바뀌게 된다.
극중에서 단연 인상깊은 것은 유나 역할의 박유림 배우와 그의 수어 연기다. 주인공의 아내 이름이 오토 즉 소리[音(おと), 오토]라는 점 그리고 유나와 오토 둘 다 비슷한 상실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수어 화자 유나의 역할은 굉장히 큰 역할을 한다. 오토를 잃은 가후쿠와 소리를 잃은 유나 사이에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나, 텍스트에 지나지 않았을 바냐 이야기를 아주 꼭꼭 씹어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게 된다.
기사를 읽어보니 가후쿠가 극을 연출하는 방식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그것과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었다. 반복되는 언어적 소통한 화학작용을 기다리는, 그야말로 실험의 과정이다. 가후쿠는 자신의 배우들에게 감정을 넣지 않고 대본리딩을 할 것을 요구한다. 이 과정 덕분에 이야기가 사람 안에 들어와 자리하는 화학작용이 더욱 드라마틱하게 다가온다.
웅얼웅얼 요약 하자면…
이야기간의 상호작용, 텍스트와 수행자의 관계, 텍스트와 음성언어의 관계 등을 메타적으로 보여주면서도… 상실 후에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태도가 무엇일지, 우리에게 어떤 위로가 필요한지를 얘기해주고… 끝나고 나니 할말이 넘 많은데 나의 능력으로는 정리할 길이 없어보이는 영화다. 영화관에서 봤을 때 더욱 마법 같아지는 순간이 있으니 기회가 된다면 꼭 영화관에서 봐주시면 좋겠다.
한 가지 찝찝한 게 있다면, 몇몇 여성 인물들을 ‘인간’이 아닌 ‘여성’으로 굳이 선을 긋는 것 같은 지점이다. 원작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하루키를 필두로 한 일본 작가, 혹은 헤테로 남성 작가 특유의 여성·섹스·음악이 등장하는 그 분위기는 어머니의 젖무덤과 누이의 초경, 모체 숭배 뭐 그런 류의 대목을 마주할 때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섹스 뒤에 항상 이야기를 낳는 오토나 극 후반부에 바냐가 소냐에게 위로받는 모습 등등이 그러하다. '여성'이라는 개념이 기능적 장치로서 작동하고 있다. 더 넓은 사유로 나아가지 못했다면 자칫 유치해지는 지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런 장치가 현재로선 유치하지 않으며, 작중에서 잘 기능하고 있다는 뜻). 오토라는 인물과 기능으로서의 여성성 결합되어 그 헤테로 남성 화자 특유의 분위기가 형성되는데... 오토가 아이를 잃은 '모체'라는 사실이 자꾸 행간에 침투하는 모습이 보인다. 물론 남편인 가후쿠의 시점에서 오토의 서사가 비춰지기 때문에 그의 시각이 작품 전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밖에 없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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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작가인 리키 저베이스 특유의 인간혐오가 고스란히 녹아있으면서도 오밀조밀한 인물간의 소통을 통해 모종의 인류애를 빚어낸다. 토니의 언행은 한결같이 지랄맞고 사탄도 울고 갈 험한 욕을 지껄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고스란히 덮으려는 그의 언행은 어찌보면 가후쿠와 닮아있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생활밀착형 드라마고 30분짜리 에피소드로 되어있어 편하게 보기 좋다. 누군가를 잃은 뒤 당신은 후회막급 가후쿠가 될지 개싸가지 토니가 될지?<출발 비디오 여행>에서 영화 대 영화로 좀 만들어주시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