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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얀 Apr 26. 2022

편지 빌런

편지,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콘텐츠

2022.04.24


     오늘도 생각만 하다 글을 그르쳤다. 글 쓰는 일은 너무 힘들다.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항상 보글보글 끓는점을 유지하진 않더라도 보온병에라도 담아 따땃히 유지시켜줘야 하는데... 일회용 컵에 따라두었던 차처럼 밍밍한 종이 맛만 난다. 이번 주에는 꽤나 적당한 삶을 살았다. 큰 아이디어 회의가 있었고, 양보다 질을 추구하고자 딱 두 개 열심히 꾸려서 팔았다. 덕분에 야근도 많지 않았고, 얼떨결에 첫 회식도 했고, 뭐… 괜찮았다. 미온수의 삶이었다. 이쯤에서 미적지근한 흐름에 제동을 걸어줘야겠다 싶어서 주말에는 좀 움직여보고자 다짐했고 애인과 해방촌 나들이를 갔다.


    우리는 스토리지 북앤필름이라는 독립서점에 갔다. 서점 앞에는 “구경만 하는 방문은 자제 부탁드립니다”라는 식의 말이 쓰여있었고 우리는 뭐라도 한 권 살 각오로 입장했다. 독립출판물들은 정말 하나같이 매력적이다. 니치하고 키치한 면면을 꼬집는 기획력에 감탄하고,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한 권의 쓸모로 제작해내는 작가들의 열정에 감탄한다. 물론 그중에는 ‘내가 이 사람의 사념을 왜 알아야 하지’ 싶은 책들도 많았다. 내가 독립출판을 하지 못하는(?) 이유다. 내 글을 누가 읽어줄까? 하는 겁쟁이적 생각 때문이다. 그렇게 책들을 구경하던 중 눈에 띄는 책 한 권이 있었다. <조금 더 쓰면 울어버릴 것 같다. 내일 또 쓰지.>라는 책이었다. 부모님이 연애하던 시절 아버지가 어머니께 쓴 편지 50통을 딸들이 엮어 출간한 책이라고 했다. 뒷면의 발췌문을 읽고 홀린 듯 구매했다.


<조금 더 쓰면 울어버릴 것 같다. 내일 또 쓰지> 후면


    이 글은 책 리뷰가 아니다. 왜냐하면 아직 다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하필 이 책을 “왜” 샀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다. 나는 사랑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로맨스 장르의 콘텐츠는 절대 자발적으로 소비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편지’ 앞에 약해지는 것 같다. 편지는 누가 시켜서 쓴 글도 아니고, 다수에게 읽히기 위한 글도 아니고, 오직 수신인에게 닿고자 하는 목적만을 지녔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절절하고 구체적이고 부끄러움을 모르며 솔직할 수밖에 없다. 편지가 사랑해 한 줄로 끝나든 그날 있었던 일을 소상히 적어내든 발신인의 마음을 감히 상상하면서 혼자 마음 벅차 하는 시간이 너무 좋은 것 같다.


     물론 내가 수신인이 되지 않는 이상 남의 편지를 읽을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지만 말이다. 내가 2 회독 한 몇 권 안 되는 책 중 하나는 존 버거의 <A가 X에게, 편지로 씌어진 소설>이다. 감옥에 간 애인이자 혁명동지에게 쓴 편지로 구성된 소설로, 서간체의 절절함, 둘만 아는 맥락, 무형이지만 무엇보다도 단단한 맹세 혹은 결의 같은 것이 보여서 모든 줄에 형광펜을 치고 싶었다. 어제 구매한 책도, 존 버거의 소설도, 읽으면 읽을수록 두 사람만 아는 세상을 내가 염탐할 수 있다는 관음증적인 쾌락이 존재하는 것 같다.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한다. 진심을 다 해 적어내려가면 무언가 해소되는 느낌도 들고, 편지를 쓰는 순간만큼 단 하나의 의도나 의중이 들어가지 않는 순간도 없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진공상태에 가깝다. 정면의 수신자를 향해 직진하는 빛 같다. 우주적 사명, 태양계의 원리, 뭐 그런 거랑 거의 동일시 하고플 만큼의 성스러운 감정. 그만큼 오만해지기도 하고 뭔가 대단한 것이 된 느낌이다. 반대로, 아주 바닥으로 추락하는, 빗자루에조차 쓸리지 않는 먼지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나의 하찮은 마음이라도 겨우 엮어 너에게 보낸다면 받아줄 수 있겠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일이야. 씻고 발라내고 또 정제해서 가장 온전한 채로 전달할게. 평소의 나라면 절대로 쓸 수 없었던 구절이 대뜸 나오곤 한다.


    대학교 3학년 교환학생 시절, 즐거웠던 만큼 많이 외로웠다. 그때 나는   때마다 좋아했던 사람한테 편지를 썼다. 기숙사에서도 쓰고, 여행 다니면서도 썼다. 유럽의  도시에  때마다 우체국부터 찾는 것이 습관이  정도였다. 이곳이 얼마나 좋은지, 내가  얼마나 생각하는지, 그렇게 홀로 낯선 곳을 떠도는 일이 도리어 고독을 삭이는 일이  연유에 대하여. 내심  또한 나와의 여행을 상상하길 바라며 감상을 전달했다. 거의 편지로 공격을 했다. 그때의 나는  뒤틀려 있어서  사람 나름대로 나에게 연락과 사랑을 주고 있었는데도,  하나의 답장도 써주지 않은 그가 너무 미웠다. 그는 내가 배설한 감정에 질렸을 것이다. 점점 이상해진 나의 성격 탓에 나와 그는 아주 멀어졌고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없게 되었다. 그러나   줄의 후회도 남지 않는다.  적어 보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상대가 체할 수밖에.


    남한테 받은 편지도 다 모아둔다. 초등학교 시절 받은 쪽지도 아마 서랍 저편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절대 다시 읽어볼 일이 없을 테지만 차마 버릴 수는 없다. 순간을 박제해놓은 물건이라는 생각도 들고, 어떤 물리 에너지가 담겨 있는 느낌이다. 아주 미약하게 흔들리는 향처럼, 아주 잠깐 시간을 멈출 수 있는 초능력처럼.


    애인이 기념일이나 생일 때 뭐가 갖고 싶냐고 말하면 대뜸 ‘편지’라고 한다. 연예인 사인을 받고 싶은 맥락과 같은 것이다. 수신인이 그것을 작성했을 때 나에게 들인 시간, 순간의 생각, 아주 찰나의 진심 같은 것들을 곱씹으며 속으로 음흉하게 즐긴다. 이래서 편지가 좋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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