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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얀 May 16. 2022

미션 파서블! <나의 첫 심부름>

서투름을 견뎌내며 확장하는 어린이의 세계

NIPPON TV


일본 장수 리얼리티 쇼 <나의 첫 심부름>

はじめてのおつかい / Old Enough!

(넷플릭스 기준) 시즌1 / 총 15화 / 회당 15분


    만 2세~5세 사이의 아이들의 첫 심부름을 관찰하는 일본 NIPPON TV의 장수 리얼리티 쇼. 아이들은 부모의 부탁으로 시장이나 슈퍼에서 물건을 사 오거나, 아버지가 집에 두고 간 물건을 일터까지 가져다주는 등의 심부름을 한다. 어른들에게는 너무나 간단한 미션이지만 아이들은 이 모든 것을 혼자서 해내야 한다. 제작진은 최소한의 개입으로 아이들의 고군분투를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는다. 넷플릭스에는 이번 주에 공개됐지만 1991년에 시작된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우리가 아는 어린이 리얼리티 예능의 조상급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국내에서도 TV조선의 <난생처음>에서 유사한 형식으로 방송한 적이 있고, MBC <아빠 어디 가>,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도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회차가 종종 등장한다. 

    한 화당 20분도 안 되는 러닝타임에,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을 가볍게 보기 위해 밥친구 삼아 틀었지만 어느새 또 줄줄 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자녀가 없는 성인인 나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많아서 이렇게 글을 쓰고 여러분에게 소개한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양해 부탁드린다.



아이들의 시작은 다 다르다


    아이들이 심부름 미션에는 모두 그럴듯한 서사가 부여된다. “아빠가 이걸 두고 갔네, 어떡하지?” “동생이 열이 나네. 미역국을 끓여줘야겠어” “가게에 어린이 메뉴를 개발해야 하는데 재료가 필요해!” 그러면 어떤 아이들은 자청해서 심부름을 하겠다고 한다. 자신의 언니나 오빠처럼 엄마를 돕고 싶어서, 아니면 동생이 태어났으니 형 노릇을 해보고 싶어서다.

    형제자매가 있는 모든 아이가 심부름을 기꺼이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아니다. 엄마나 아빠가 없으면 가지 않겠다고 우는 아이, 문을 나서서도 한참을 발을 떼지 못하는 아이, 15분의 방송 분량 중에 심부름에 나서기까지 7분을 잡아먹는 아이도 있었다. 그럴 때면 부모가 아이들에게 자신들만 아는 마법의 말 한마디를 한다. “엄마가 뭐라고 했지?” 하면 아이들은 그동안 부모와 꼭꼭 했던 약속을 읊는다. 예를 들면 

- 아빠 : 엉엉!
- 딸 : 울지 않아요


또는


- 엄마 : 반짝반짝 미소는 누구?
- 딸 : 히카리쨩!!!!!


    이런 식이다. 아이들은 선창과 후창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출발한다. 부모님이 직접 만들어준 것으로 추정되는 부적 가방(사실은 마이크 가방)에도 아이를 응원하는 메시지가 적혀있다. 이런 응원과 암호가 아니더라도 사탕 한 알에 기분이 좋아져 발걸음을 떼는 아이도 있다. 참 단순하고도 복잡한 세계다.

    이렇듯 어떤 아이들은 빠르고, 어떤 아이들은 느리다.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리면 모두 의젓한 어른이 될 것이다. 최근에 노키즈존과 예스키즈존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어른들의 머릿속에 ‘어린이’가 얼마나 납작하게 그려지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용감한 어린이, 그렇지 않은 어린이, 완전 극과 극의 성향임에도 절대 싸우지 않는 어린이들.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알록달록하다. 어린이 한 명 한 명이 새로운 세계고, 모두가 너무나 다양하고 당연하다.



책임감 있는 아이들


    이 프로그램에서 많은 아이들이 운다. 엄마가 보고 싶다거나 야단맞을까 봐가 아니다. 대부분은 자신이 해내지 못했다는, 혹은 못 할 것 같다는 사실이 너무 분해서 운다. 부모에게 멋진 아들, 딸이 되고 싶고, 자기는 아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내고 싶은데, 그렇지 못하고 씁쓸한 실패를 겪어버리는 것이다. 무력감을 느낀 아이는 얼굴을 잔뜩 구기고 엉엉 울고 마는데 그럴 때면 내 마음도 갈기갈기 찢어진다. 세상에 태어난 지 3년이나 겨우 됐을까 한 저 조그마한 아이에게 어떻게 그런 책임감이 자리하는 것인지 놀랍다.

    아이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명확하게 안다. 거스름돈 받기, 글자 읽기 등 자신이 정말로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 외의 것은 어떻게든 해내려고 노력한다. 신체 협응이 겨우 이루어지는 아이는 물건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질질 끈다. 그래도 고사리 손으로 끝까지 놓치지 않고 집까지 가져온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 서툴러서 못 하겠다는 핑계를 대는 이들은 어린이보다도 어른이 훨씬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해낼 때까지 끝까지 기다려준다. 김소영 독서 교육가의 <어린이라는 세계>에서 나왔듯이, 아이들은 생각보다 혼자 할 줄 아는 일이 많다. 시간이 더 걸릴 뿐이다. 아이들도 언제까지나 “아가”라고 불리고 싶지 않다. 혼자서 해내고 싶어 한다. 인상을 잔뜩 쓰고, 작은 머리를 굴려가며, 천천히 주어진 일을 어떻게든 해내고 만다. 친구와 이 프로그램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세상은 비단 어린이뿐 아니라 서툴고 미숙한 사람들에게 관대하지 못한 것 같다는 말을 해주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어린이니까 장난감이나 간식에 한눈이 팔리진 않을까? 하지만 그것은 어른들의 생각이다. 울트라맨 주스를 두 개나 사간 아이는 시청자로 하여금 ‘그럼 그렇지’하고 팔짱을 끼게 하지만, 알고 보니 하나는 자기 먹고 하나는 엄마 주려고 산 것이었다. 또 다른 아이는 장보기 목록 중 하나를 깜빡하고 슈퍼를 나선다. ‘역시 다 외우는 건 어렵지’하는 어른들의 생각도 잠시, 미처 사지 못한 물건을 스스로 기억해내고 다시 슈퍼로 발길을 돌린다. 자신의 몫을 해내느라 온 신경을 집중한 와중에도 길 건널 때 손 들고 건너고, 주위에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민주 시민의 자질을 갖춘 아주 탁월한 아이들이다.



 잘못 사 와도 다그치지 않는 어른


    만에 하나 아이가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더라도, 어른은 다그치지 않는다. (이 문단 스포주의) 우동, 튀김, 새우를 사러 어시장에 간 아이가 있었다. 하나씩 잘 구매해 미션 클리어하고 마지막으로 새우를 사러 갔다. 그런데 귀엽고 커다랗고 분홍색인 도미의 머리에 홀려 그만 도미 회를 사 왔다. 새우 대신 몇 배는 비싸고 예정에 없던 물건을 본 엄마는 웃으며 “도미 사 왔네!”하고 환영해주었고, 너무 장하다고 안아주었다. ‘왜 도미를 사 왔어?’라고 물어볼 만도 한데 엄마는 아이의 성공을 반겨줄 뿐이었다. 나 같으면 ‘잘못 사 왔지만 괜찮아’라고 할 것도 같았지만, 맞는 물건을 사 오는 것은 이 심부름 미션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음을 곧 깨달았다. 

    아이가 미션을 완료하지 못한 채 돌아오면 다시 돌려보내는 어른도 있었다. 또 실패하고 싶지 않아 못 가겠다고 우는 아이도 있었고, 다시 안 보내려고 해도 제 발로 나서는 아이도 있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아이 혼자서 끝까지 해내도록 하는 부모의 모습은 완고해 보이면서도 마음 아팠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이따금 아이를 배웅하는 부모의 뒷모습을 비춰주는데, 거기서도 감동이 있었다. 창문으로 몰래 엿보다가 아이가 횡단보도를 건너면 ‘드디어 건넜다!’며 펄쩍 뛰며 좋아하고, 아이가 사라질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며 ‘괜찮을까?’ 하고 중얼거리기도 한다.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아이의 입장에서 볼 때와는 또 다른 짠함이 느껴진다. 이제 부모의 손을 벗어나서 1인분을 해내는 때가 찾아온다고 생각하면 아이의 성장은 기쁨인 동시에 슬픔이다.



 최소한의 개입


고군분투 제작진 / NIPPON TV

    아이를 ‘혼자’ 보내긴 하지만, 만약의 상황에 대처하고 다양한 촬영각을 확보하기 위해 아이의 주변에는 제작진들이 포진해있다. 미션 수행에 시간이 지나치게 오래 걸리거나 아이의 안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경우에만 NPC처럼 약간의 힌트만 준다. 총 15화 중에서 카메라맨이 자의로 개입한 경우는 한두 번 겨우 본 것 같다. 그러나 아이의 심부름 성패 여부에는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애초에 성패란 없지만 말이다!

    참 신기한 것은, 주변에 PD와 카메라가 잔뜩 있는데 아이들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이의 눈높이를 찍을 수 있도록 손잡이 있는 가방에 카메라를 넣고, 지역사회 주민처럼 분장한 제작진의 카모플라주 덕분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 심부름 생각이 아이 머릿속에 가득가득하기 때문이렷다.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평소에 길에서 마주친 아이들의 상당수가 바닥을 향한 시선과 혼잣말로 머리가 가득해 주위를 볼 여력이 없어 보이긴 했다. 물론 제작진의 설명에 의하면 이런 식의 촬영은 만 5년 3개월까지가 한계라고 한다. 머리가 큰(?) 아이들은 주변 카메라의 존재를 마치 음방 아이돌처럼 착착 잡아내기도 한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돌발행동을 잘 하진 않는다. 다만 어른을 능가하는 체력으로 우다다다 카메라맨들을 앞서가곤 한다. 그럴 때면 모든 어른들이 투철한 직업정신을 발휘해 아이를 우르르 쫓아간다. 때로는 그 모습이 좀 버거워 보이기도 하는데, 콘텐츠 제작자의 입장에서 안쓰럽고 멋있었다.

    아동이 나오는 예능에서 흔히 써먹는 그놈의 인형빙의물 실험카메라를 볼 때 기분이 이상했다. 그런 류의 콘텐츠에서는 상황을 미리 설정해놓고 아이의 반응을 살피는데, 어른의 생각을 확인하거나 감동을 주기 위한 실험 도구로써 아이를 보는 것 같은 시선이 싫었다. 유튜브 채널 ODG의 몇몇 콘텐츠를 볼 때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아이들이 ‘어른과 다른 방식’으로 ‘순진하게’ 반응할 것이라 가설을 세우고, 가설에 부합하면 좋아하고, 가설을 폐기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콘텐츠로 삼는다. 적어도 넷플릭스에 공개된 <나의 첫 심부름>의 에피소드들은 그러한 조작적인 개입을 배제하고, 아이가 자연스러운 상황에서 능동적으로 움직였다. 모두가 아이의 성취를 응원하는 형태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지역사회


 NIPPON TV 

    첫 심부름 대작전의 메인 NPC들에게는 ‘아이가 부를 때까지는 나오지 말아주세요’등의 기본적인 부탁은 하지만, 이웃의 모든 어른들에게는 언질을 줄 순 없다. 어른들은 신기하게도 자연스럽게, 과하지 않게, 적절한 도움을 준다. 가야 하는 가게를 찾지 못해 엉엉 우는 아이에게 시식용 양갱과 야채 절임을 준다. 아이가 길을 물어보면 직접 데려다 주기보다 아이가 가야 하는 길을 보여준다. 높은 곳에 손이 닿지 않는다면, 직접 꺼내 주기보다 아이를 들어 올려 준다. 그러면 아이는 심부름을 해내고야 만다.

    심부름 가는 길은 대부분 부모님과 자주 갔던 길이다. 아이가 지나가면 근처 가게 사람들이 이름을 부르며 응원의 한 마디를 건넨다. 가게에서 장을 보면 단골 서비스라며 에누리를 해주기도 한다. 어린이는 큰 소리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다. 가족에서 또래집단, 그리고 지역사회로, 아이들의 상호작용 범위는 차근차근 넓어진다. 해외 결연아동을 후원하면 항상 듣는 이야기가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경제적인 관점뿐 아니라 사회적 관점에서도 그러하다. 하나의 사회인으로 대우받고,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고, 정말로 필요할 때는 도움을 받으며 타인과 어떻게 상호작용 해야 하는지 배우게 된다. 




전국 각지의 아이들


    연예인 자녀의 호화로운 체험들을 공영방송이 발 벗고 나서서 전시해주는 것은 <슈돌>의 오랜 문제점으로 지적받아왔다. <나의 첫 심부름>은 그렇지 않다. 일본 전국 각지의 도시, 시골, 도서지역 등에서 지내는 어린이들의 심부름을 소개한다. 어떤 아이는 논길을 가로질러 심부름을 가고, 어떤 아이는 빌딩 숲 사이 신호등을 기다리고 좌우를 살펴 길을 건넌다. 각 회차의 초반 몇 분은 <6시 내고향>처럼 해당 지역의 명물이나 특산물을 소개해준다. 부모님의 직업도 농수산업 종사자부터 자영업자까지 다양하다. 

     TV에 나오는 어린이는 ‘대표성’이 아니라 ‘다양성’을 지녀야 한다. ‘나 같다!’하고 생각할 수 있는 인물 하나가 아이에게 실제로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마치 내 이야기 같은 노래를 들어도 마음의 위로를 받는데, 정체성이 형성되는 시기의 아이들에게 나와 닮은 사람과의 조우는 얼마나 큰 위안이 되겠는가. <블랙 팬서>가 나왔을 때 흑인 아이들에게 꿈이 생겼고, <캡틴 마블>이 나왔을 때 많은 여자아이들에게 롤모델이 생겼듯이 말이다. <슈돌>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는 사유리의 가족이 나오고, 다행스럽게도 우리 사회도 '정상가족 신화'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는 낌새가 보인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다양성이 자연스럽게 깃드는 데 있어서 콘텐츠 제작자에게 막중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김나영의 nofilterTV

 시리즈를 다 보고 나니 김나영 씨네 신우 군의 영상이 생각났다. 엄마와 달리기 시합을 하는데 아이는 자신의 힘으로는 엄마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와르르 무너진다. “난 아기라서 못 해…” 귀엽긴 하지만 마음이 너무 아팠다. 이렇듯 서툰 자신을 견뎌내며 성장하는 아이들이 참 대단하고 장하다. 우리도 한때 스스로의 서투름과 맞서며 어른이 되었다. 아이들과 마주칠 때마다 그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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