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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랭 Dec 23. 2021

불멸

불멸을 원할 만큼은 강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기에 힘을 내야 한다.

“나는 불멸하는 것이 되고 싶어. 내 무덤 위에 수도원이 지어지고 수도승들이 기도했으면 좋겠어.”

“나는 온전하게 나의 의도로 죽고 싶어.”

“자살을 하겠다는 거야?”

“아니, 아니.” 여기서 나는 말을 멈춘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말을 할 때는 원인을 규명할 수 없는 헛돔이 있다. R과 L의 발음을 위해 혀를 굴릴때 모이는 둥근 공기처럼 사소한 허공. 대화는 이러한 공백을 제대로 해석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어휘력이 부족해서인지, 적절히 묘사할만큼의 이해가 부족한지 가늠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다른 것들 때문에 죽고 싶지 않다는 것 뿐이야.”

문장을 마치고, 가둬진 공기는 간단히 삼켜진다. 자갈처럼 내려앉는다.


다른 것들. 갑작스럽게 찾아올 수 있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길었다. 이 도시에서 한 해에 한 명은 총에 맞는다. 기숙사 창문은 자살을 막기 위해 창살이 박혀 있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내가 비행기를 폭발시키지 않을 것임을 몇 차례에 걸쳐 증명해야 한다. 이것은 누군가 이 많은 검사들을 피해 비행기를 터뜨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실종되었던 학생의 시체가 하류에서 연습하던 카약 선수들에게 발견되었다. 무장하지 않고도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흑인 소년의 기사가 유통되었다. 이 많은 죽음들을 요약하기에 ‘다른 것들’ 이라는 단어는 왜소하다. 내 죽음이 되기 전에는 추상적이고, 누군가의 죽음임을 생각하면 무겁다. 혹자는 어떤 죽음들에게 덜 가깝다는 것 또한 특권이라 하였다. 근원을 알 수 없는 향불 연기 같은것이 공기중에 맴돌고, 나는 그것을 들이마시며 죽음을 생각했다.


위험들, 죽음들, 다른 것들. 그것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온전히 독립된 의지로 죽는다는 것’은 우선 어떤 불쾌한 사고들을 피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가능한 정황은 구체적이지만 공포는 막연하다. 대비할 수 없는 불안을 오래 안고 사는 것은 낫지 않는 상처가 덧나도 계속 햝는 것과 같다. 열린 상처에 고인 아린 맛을 혀에게 계속 각인시키며 품고 있는 것이다. 그 상처가 낫지 않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뒤틀린 애정으로 돌보는 것이다. 온전히 죽기를 바라지 마지않아 두려움을 만드는 고통을, 두려움의 고통을 사랑하는가? 사랑하지않는다면 왜 놓지 못하는가? 사랑하지 않을수는 없다. 진공에 존재하지 않는 한 이 두려움은 이 몸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손등에 찍힌 찰과상을 애써 증오하지 않는 것처럼, 아물며 흐릿해지면서도 지워지지 않는 화상 자국을 흔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나에게 불멸의 의지를 선언한 인물은 (’불멸 친구’라고 이름을 붙여두자.) 인터넷에서 찾은 사고 사진 수십장을 작업실 벽에 붙여놓았다. 키워드만 안다면 간단한 검색으로 찾을 수 있는 악명높은 포럼들에서 긁어온 것들이 분명했다. 그 포럼들의 주소들이 워터마크로 각인되어있었으니까. 크지않은 이미지들이었기 때문에 사고 정황보다 벗겨진 살의 붉은 색감이 당장 더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그는 이미지들을 보고 즉각 눈을 돌리거나 그런 이미지들을 모아둔 행위를 곧장 비난하지 않는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의도를 먼저 질문했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을 보는 동안 그의 설명을 들었다. 사람을 심리적으로 자극할 수 있는 이미지에 어떤 힘이 있으며, 그것을 똑바로 응시함으로서 얻는 초월이 있다는 것이 화두였다.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은 사고의 끔찍함을 두 눈으로 보고도 살아있음으로서 어떤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두려움을 정복할 수 있는가? 두려움을 주는 힘을 행사하여 두려움 위에 힘을 행사할 수 있는가? 분명한 힘이 작용하였다면 그것은 잔인함이었다. 나무 기둥에 칼을 박는 행위와 같은 잔인함이었다. 나무는 칼에 침묵하지만 행위의 흔적은 남는다. 칼을 박은 자의 기억은 남는다. 이 잔인함을 해독(解毒)할 방도는 없다.


한 시절 불멸 친구의 아버지였던 남자는 사슴 사냥 시즌이 되면 숲에서 사슴을 잡아왔다. 생업은 아니었지만 권력을 행사했다. 이 남자가 집에서 부재한 중에도 온통 이 권력이 전시되어있었다. 불멸 친구는 벽에 걸려있던 사슴 박제를 아래로 내릴때 혹시라도 이것을 실수로 망가뜨릴까 노심초사했다. 박제라는 것은 살과 피를 모두 벗겨내고 잘 깎은 뼈대 위에 가죽을 붙여놓은 것에 불과함에도. 샤워실에는 바람에 체취가 실려가지 않도록 체취를 없애는 바디워시가 있었다. 냄새가 없어진 몸이 살상력을 가질 수 있다는 상상은 잘 와닿지 않았지만, 효과를 제법 보였는지 바디워시 통은 가벼웠다.


흔적 없이 다가설 수 있는 몸에 대한 상상은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냥할 수 있는 총도 없었고, 묵격되지 않는 안전함을 원했을 뿐이었다. 관념적인 소망일 뿐이었다. 사냥 시즌의 숲에는 걸어다닐 때 동물과 혼동되지 않도록 밝은 옷을 입고 다니라는 경고 사인이 붙는다. 사람의 형상으로 눈에 띄지 않고 발소리를 내면 총을 맞을 수 있었다. 총을 들고 몸을 숨기는 입장이 아니라면 목격되어야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아시안의 신체가 목격된다는 것은 기묘한 현상이었다. 길에서 사람을 자주 마주칠 일은 없었지만 나를 뚫어져라 본다면 그러려니 해야했다. 그 지역의 사람들은 높은 확률로 살면서 아시안을 직접 볼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불멸 친구의 아버지는 식탁에서 중국인에 대한 농담을 했고 나는 웃어넘겼다. 그 집의 목공소에는 공화당 대선 후보 지지 사인이 대문짝만하게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불멸 친구가 도서관 창살은 죄책감 없이 넘어도 사슴 박제를 내릴 때는 눈에 띄게 긴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것을 필요로 했고, 나는 하룻밤만에 움직일 수 없는 것들을 알았다.


불안을 햝거나, 잔인함을 전시하거나. 겁에 질렸기는 매한가지다. 세계가 거꾸로 뒤집힌 모래시계처럼 발아래로 사라져버릴 것 같음을 느끼는 시기였다. 그는 사람을 쉽게 믿지 않았고 나는 믿어야 할 사람을 알 지 못했다. 둘은 같으면서도 달랐다. 그는 힘으로 성당을 짓고 싶어했고 나는 결국 어느 순간 그 성당의 돌쩌귀를 이루는 것들에 무감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닳았다. 부패한 사체의 눈을 보며 가슴아플 수 있으며, 인간이 아닌 기물처럼 목격되는 것에 분노하고, 내가 이 몸에서 불멸까지 힘으로 던져 닿을 수 있는 다윗의 돌은 없다는 것을 느껴야 했다. 이제는 그것이 존엄에 대한 갈증이었다는 것을 안다.



It murmurs inside. It murmurs. Inside is the pain of speech the pain to say. Larger still. Greater than is the pain not to say. To not say. Says nothing against the pain to speak. It festers inside. The wound, liquid, dust. Must break. Must void.
그것은 속에서 속삭인다. 그것이 속삭인다. 그 안에는 발성의 고통과 말하고자 하는 고통이 교차한다. 더 거대한. 말하지 않고자 하는 고통보다 더 강대한. 말하지 않는. 말하기를 부추기는 고통에 반하여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속에서 곪아들어간다. 그 상처, 액체, 먼지. 부서져야하는. 비워져야 하는.



내가 아는 존엄은 때로 발화되지 못하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 어떤 신체는 발성되지 못하는 침묵속에 들끓는다. 발화되지 않는 바로 그 이유로 발화할 욕구를 느끼기에 뚜껑을 막아놓은 주전자처럼 터지기 직전의 상태로 고요하다. 놀랍게도 터지지 않는다. 그러나 속삭인다. 끊임없이 속삭인다. 그래서 그 주전자는 따뜻하다. 때로는 뜨겁다.


아나 멘디에타는 자신의 몸을 본딴 실루엣을 지상에 여러 형태로 구현한 실루에타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이다. 멘디에타의 몸을 통과해 꽃이 자랐고, 불이 타올랐으며 눈 위로 피같은 모양이 남았다. 그의 작업은 하나의 인간을 흔적만 남기게 통과한 재난이 자연에 녹아든 현장들이었다. 인체의 형상을 외곽만 남기고 비워버린다는 것에서 폭력적이고, 사진으로 담긴 순간에는 자연의 형상으로 생동한다는 면에서 폭력에 저항한다. 불안에 떠는 몸들은 기억한다. ‘여체는 재난 속에 해체될 수 있다.’ 아나 멘디에타는 여체가 햝고있던 불안의 상처를 찢어 벌려 보여준다. 그러나 벌어진 틈으로 피와 내장이 전시되지 않는다. 어떤 존엄을 향한 길은 우리를 짓누르며 때로는 죽이는 것들이 우리를 통과하게 둔 후에도 살아가는 것들이 있다는 믿음으로 지어진다. 그것은 불멸에 대한 열망과는 다르다. 꽃은 시들고, 불은 꺼지며, 눈은 녹는다. 그리고 다시 반복된다. 그러나 결코 같은 모습으로는 아니다.


아나 멘디에타의 죽음은 여러 방향으로 화자되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할 리 없을 사람이 고층 빌딩에서 떨어져내렸다는 것은 살인을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 죽음을 읽어들어가고싶지 않다. 죽음의 순간이 한 사람의 생을 요약하기에는 결국 순간이다. 아나 멘디에타는 죽음 이전에 더 많은 시간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왔다. 죽음의 파찰음보다 부재의 틈속에서 살아돌아오는 것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틈에 존엄이 있다.


Ana Mendieta, Silueta Works in Mexico, 1973–77/1991. Pigmented inkjet prints, four parts, 13 1/4 x 20 inches (33.7 x 50.8 cm); eight parts, 20 x 13 1/4 inches (50.8 x 33.7 cm). Gift of Barbara Lee, The Barbara Lee Collection of Art by Women. Courtesy the Galerie Lelong. © The Estate of Ana Mendieta Collection, LLC. *



최근에는 한 가지 소망이 있었다. 성당을 짓고 싶었다. 십자가가 있는 종류는 아니다. 그저 쉽게 잘 수 있는곳이면 충분하다. 한 친구는 죽음을 자주 이야기한다. 그래서인지 잠든 친구의 얼굴을 마주 보면 가끔 웃음이 난다. 걱정이 천근이어도 곤하게 잠을 잘때는 그렇게 평온해보일 수가 없다. 깊은 잠에 든 사람의 얼굴은 조금씩 어릴 적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한다. 볼을 찔러도 잘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또 몇 시까지 꺠어있었냐며 놀리고 다시 자게 두면서 방안을 정리할 때는 가벼운 무력감과 즐거움이 교차한다. 나는 너희들의 성당을 짓고 싶다. 약방 서랍같은 지하에 층층이 관이 수납된 웨스트 민스터 같은 것 말고. 천장이 높고 소리가 아득히 울리는 공간에 있으면 하찮은 기도도 하늘에 닿을 것 같잖아. 시간을 들여 쌓은 삶이 폭우 한번에 녹아내리지 않을 단단한 벽을 세우고 싶어. 성당의 골조는 성모의 갈비뼈라는데, 우리는 어느 숲에서 어떤 뼈를 사냥해와야할까?


사라지고 싶다는 친구야, 이브의 몸을 만드는 것에는 남자의 갈비뼈 한 대만으로 충분했다는데 어느 날 네가 없으면 얼마나 오래 자야 내 뼈 한 대로 네가 하나 더 생길까? 


너는 유적으로조차 남고싶지 않겠지만 몸은 지상을 버텨낸 만큼 무게를 남긴다. 그러니 흔적 없이 사라질 수는 없는 네가 머물 공간이 존엄했으면 좋겠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힘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불멸을 원할 만큼은 강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기에 힘을 내야 하니까.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딕테] 차 테레사 학경 (저자 역)

https://www.icaboston.org/art/ana-mendieta/silueta-works-mexi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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