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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랭 Jan 04. 2022

죽음과의 소극적인 동행

현대인이 죽음과 맺는 무의식적 관계들

사건으로서의 죽음


순간으로만 두었을 때 개인에게 죽음은 어떤 극단적인 사건입니다. 죽음의 순간은 한 번 일어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내게 익숙했던 모든 것이 다른 것이 됩니다. 개인의 신체는 부패하고, 소유는 이전되며, 가족과 지인들은 이 개인을 상실합니다. 생애 내내 나와 함께하며 나를 이룬것들이 더 이상 ‘아니게’된다는 감각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이 감각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즉 죽음을 감각할 수 있는지 알려줄 사람도 없지요. 삶의 다른 많은 경험들과 달리 이것은 ‘겪어내는’것이 아닙니다. 좋은 가설을 세울 수는 있지만 검증할 방법은 없습니다. 가장 확실한 것은 단 하나, 모든 살아있는 생물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3세 아동도 죽으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두려움을 느낍니다. 5-9세의 아동들은 죽음을 피할 방법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적어도 자신에게는요. 7-11세에 이르면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하게 됩니다. 부모가 해결해줄 수 없는 추상적이고 불가피한 위험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1) 그러나 이 발달 단계를 모두 거친 성인에게도 죽음은 어려운 것입니다.


개인의 일상에 빗대어 비교할수록 이 명제는 이상합니다. 일상에서 하는 행동이라고는 버스 안에서 흔들리기, 키보드 두드리기, 토스트 굽다가 좀 태우기, 메일 확인하고 머리부여잡기 같은 것들인데. 어떻게 이 행동들 사이로 그런 해괴한 사건이 발생한다는 걸까요? 이 일상 속에 죽음을 어디까지 들여놓아야 할 지도 애매합니다. 장 속의 박테리아가 내 감정을 결정하기도 한다는 연구가 담긴 기사를 읽으면서 언젠가 그 박테리아들이 나의 장기를 뜯어먹으며 부패를 촉진할것이라는 생각을 굳이 해야할까요? 비행기를 탈때마다 추락사의 가능성에 대비해 재산을 정리해놓아야 할까요? 격무끝에 ‘이러다 죽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죽음의 존재론적인 의미를 생각해야할까요?


죽음의 부정


현대 사회는 죽음을 시스템에 맡기고 있습니다. 죽음의 장소도 가정에서 병원으로 넘어갔습니다. (2) 장례절차도 상조회사를 거칩니다. 유족들은 시신을 직접 염하지 않고, 상복에서부터 관의 종류까지 상조회사가 제공하는 선택지를 기준으로 따릅니다. 죽음의 흔적이 연상되지않도록 가공되고 포장된 고기를 섭취합니다. 붉은 덩어리를 구입하며 육질과 마블링, 아니면 행복하게 풀을 뜯는 건강한 동물을 연상하죠. 젤리를 구입할 때는 탱글거리는 식감을 생각하죠. 젤라틴이 연골조직과 가죽을 끓여 만들어진다고는 광고하지 않습니다. 공장식 축산 및 도축 현장을 자세하게 상상할수록 소비하고싶어지지 않을테니까요.

빠르게 움직이는 액션 영화에서 건물 로비가 부서지고 지나가던 자동차들이 전복될 때 내부의 행인들을 조명하지 않습니다. 카메라는 질주하는 주인공의 차랑을 따라갑니다. 이 안에서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사회적인 가치들로 만들어진 세계관안에서 한시적인 불멸, 혹은 상대적인 안전함을 느끼는 것에 익숙해져있습니다. 죽음을 의식하는 것으로 파고들어오는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는 것보다, 일상을 견고하게 하는 세계관의 일원이 되어 생존을 위한 동력을 얻는 것입니다. 이런 ‘죽음의 부정’은 일상적입니다.


일상적인, 이기적인


그러나 현대인이 정말로 죽음과 괴리되어 살고있지는 않습니다. 심리학에는 ‘공포 관리 이론(fear management theory)’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속한 집단의 세계관에 의존합니다. 이 세계관의 상징과 가치들을 지키며 소속감을 보장받는 것입니다. 또래 집단에 소속감을 느끼는 것으로 희비가 엇갈린 적이 있다면, 성적 석차의 고저로 자존감이 흔들린적이 있다면, 직접 만난적도 없는 외국인들에게 막연한 적대감을 느낀 적이 있다면, 이 이론에서 설명하는 심리적인 반응을 겪은 것입니다.

‘공포 관리 이론’ 관련 실험들은 사람이 이 세계관을 공격받았을 때 얼마나 배타적으로 반응하는지를 다양하게 보여줍니다. 피실험자들은 죽음을 의식할수록 이 사회적인 세계관에서 이질적인 사람들에게 덜 수용적입니다. 일례로, 죽음을 연상하는 질문에 답했던 11세 아동들은 이민자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3) 죽음을 의식할수록 스스로의 종교, 정치, 문화, 가치집단을 비판하거나 그에 어긋난 사람들에게 더 적대적으로, 때로는 더 가혹하게 반응합니다. (4) 역으로 이런 비판에 노출될수록 죽음을 더 의식하기도 합니다.(5) 외부집단의 사고 사망소식이 안정을 주기도 합니다. (6) 이 무의식적인 판단들이 죽음에 대항하는 의식적인 행동들을 구성합니다. 이 판단들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납니다.

물론 현대인은 내년에도 해가 잘 떠오르도록 직장 말단 사원의 심장을 뽑아 제단에 바치지 않습니다. 경제활동을 하러 나가기 전에 벽에 지폐를 그리고 창으로 맞추며 승진 성공을 기원하는 춤을 추지 않습니다. ‘불멸하는 이름을 남긴 사원’이 되기 위해 회사에 목숨을 바치러 가지도 않습니다. 용맹한 사원 서사시를 노래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생명수당을 본인이 챙기고 하청직원에게 위험한 일을 맡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큰 일을 앞두고는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하거나, 절에 이름을 올리러 갑니다. 작품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고 이력서에 한 줄을 더 넣기 위해 미심쩍은 근무환경을 견뎌냅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호응을 받으면 즐거움을 느낍니다. ‘중국인을 받지 않는다’는 표지를 붙인 식당을 보면 위생적이라고 감탄하는 사람도 해외에서 폭행당하는 아시안의 소식을 보면 불안을 느끼겠지요.


이 세계관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배타적인 태도는 심리적인 장치를 제공할 뿐 상황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힘의 구조를 외면하게 합니다. 소속감과 안정을 의존한 집단의 기준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수록, 집단 외부의 사람들에게 가혹할수록, 개인에게는 더 엄격한 잣대가 들이밀어집니다.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건강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을 배타적으로 대할수록 나 자신이 질환과 장애를 겪지 않아야 할 이유가 더해집니다.

여기서 이 세계관이 개인을 밀어넣는 벼랑이 보입니다. 이것은 개인이 이길 수 있는 경쟁이 아닙니다. 질환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기때문입니다. 질병과 장애는 나이와 경제적인 지위와 관계없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생애 주기를 건강하게 넘겼다 하더라도 생애 말기에는 부자유한 신체가 되고 시스템에 위탁된 개인이 됩니다. 외면해왔던 타인이 자신이 됩니다. 충분히 많은 재산을 모은다고 하여도 제도적인 공백들은 실제합니다.


힘의 제국


“그들이 몰락하지 않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이 유한한 양의 것임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불균형한 힘들의 균형에 따른 것임을 고려치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움직임에 잠시 멈춤의 시간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오직 그런 시간만이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게 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론짓습니다. 운명이 자신들에게만 모든 자격을 부여했고, 보다 열등한 사람들에겐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고. 이때부터 그들은 자신이 지닌 힘보다 더 멀리 나아갑니다. 그 힘에 한계가 있음을 몰라서 필연적으로 더 멀리.”


여기서 시몬 베유는 [일리아스]를 지배하는 힘의 장력을 읽습니다. 이 서사시를 움직이는 동력은 아킬레우스의 분노이지만, 힘은 그리스와 트로이 사이에서 손을 바꾸며 거치는 모두를 손상시킵니다. [일리아스]의 작가는 망명자인 동시에 정복자들의 후예이기도 합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고향을 잃은 그리스인 작가가 먼 선대에 멸망시킨 트로이를 회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트로이 전쟁의 그리스인들에게서 자신의 선조들의 모습과, 자신의 고향을 정복한 군사들을 봅니다. 몰락을 앞두고 목숨을 애걸하는 트로이인들에게서 망명자인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몰락은 일견 자만한 자에게 주어지는 복수처럼 보이지만 [일리아스]는 복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서사의 누구도 힘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죽음의 연쇄가 지나고 난 자리에서 보이는 것은 힘의 움직임 그 자체이기때문입니다.

베유는 글의 말미에 죽음과 관계맺는 전략의 다음 실마리를 둡니다. “우리는 다음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사랑할 수 있고 정의로울 수 있습니다. 힘의 제국을 인식하고, 힘의 제국을 존중하지 않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전란의 중심에 살고있지 않은 우리는 일리아스의 명장들도 가지지 못했던 ‘멈춤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음을 생각해야합니다.    



[슬픈 불멸주의자] (2016) 셸던 솔로몬, 제프 그린버그, 톰 피진스키 저. 이은경 옮김. 흐름 출판.

[죽는게 참 어렵습니다] (2021) 김영화, 김호성, 나경희, 송병기 저. 시사 IN 북.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2021) 시몬 베유 저, 이종영 옮김. 리시올 출판.


(1) 슬픈 불멸주의자 : 48-58p.

(2) 2019년에 집에서 사망한 사람은 전체의 13.8% 이지만 병원에서 사망한 사람은 77.1%. : 죽는게 참 어렵습니다. 12p

(3) 슬픈 불멸주의자: 56-57p.

(4) 자신의 죽음을 상기한 판사들이 경범죄에 평균보다 9배 높은 보석금을 부여 : 슬픈 불멸주의자 33p

(5) 슬픈 불멸주의자 : p.64

(6) 슬픈 불멸주의자 : p.230-231

(7)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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