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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경 Dec 05. 2021

불가침영역

내가 부엌 싱크대 앞에 서면 줄리는 쪼르르 달려와 싱크대 위로 점프를 하고 자리를 잡는다. 고양이가 싱크대 위에 올라오는 건 좋은 습관은 아니라 매번 줄리를 안아 바닥에 내려놓곤 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줄리는 다시 점프해 싱크대로 올라와 차가운 대리석 위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한 백 번쯤 세어보다가 포기하고 요새는 줄리를 그냥 둔다.


처음에는 부엌 선반에 넣어둔 사료통을 꺼내 밥을 주는 줄 알고 줄리가 따라오는 줄로만 알았다. 줄리 밥그릇에 밥을 부을 때 줄리 표정이 가장 신나있거든. 아주 신이 나면 내가 사료통을 기울이는 각도를 따라 줄리도 고개를 갸우뚱하며 밥을 오매불망 바라보기도 한다. 어쩌다 귀가가 늦어서 식사 시간이 늦어지면 싱크대 위에서 애옹 하고 나의 눈을 바라보며 호통을 치기도 하신다.


가만 보면 줄리는 밥을 먹은 직후에도 내가 싱크대 쪽으로 가기만 하면 쫓아온다. 대부분은 설거지를 하는 경우인데, 줄리는 설거지 구경을 좋아한다. '뽕주댕이'나 수염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도록 물이 튀기도 하지만 줄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옆에 자리를 잡고는 설거지하는 모습을 꿋꿋하게 바라본다. 그릇에 퐁퐁을 다 묻히고 물을 틀면 싱크대 볼 위를 점프해서 조리대 위를 넘나들기도 한다. 불타는 링을 통과하는 서커스 사자가 따로 없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어릴 때 엄마가 설거지를 하고 계시면 식탁 의자를 끌고 와 구경을 했다. 식탁 의자 위에 올라서서는 엄마에게 다음에 씻을 접시를 하나씩 지정했다.


"다음은 이거. 그거 다음은 이거. 그다음에는 이거."

"순서를 정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큰 접시부터 씻어서 작은 볼로 옮겨야 해."


아마 나는 설거지를 해보고 싶었을 텐데, 그것이 못 미더웠던 엄마는 나에게 설거지를 못 하게 하셨을 거다. 지금도 청소는 불가침영역이다. 나도 엄마랑 똑같이 손, 발이 다 있어서 걸레질도 할 수 있고 청소기도 돌릴 수 있고 설거지도 할 수 있는데, 엄마는 유독 남이 하는 것은 못 미더워하신다.


"엄마, 청소기는 기계라 내가 끌고 돌아다니건 엄마가 끌고 돌아다니건 다 똑같이 먼지를 빨아들일 텐데. 기계는 인간을 차별하지 않아."

"됐어."


엄마의 설거지 루틴은 엄격하다. 일단 싱크대 볼은 두 개가 있어야 한다. 왼쪽 볼에는 퐁퐁을 풀어둔 바가지가 있고 여기에 음식물을 휴지로 닦아낸 접시를 담근다. 퐁퐁 전용 수세미로 볼 안에서 비누칠을 마치고 비누 옷을 입은 접시를 오른쪽 볼의 물 담긴 바가지로 옮긴다. 오른쪽 볼로 그릇을 모두 옮기면 헹굼 수세미를 꺼내고 개수대 물은 '쫄쫄쫄' 흐르게 약하게  튼다. 확 틀면 또 혼난다. 반드시 1/3 정도만 수전을 열어서 물이 ‘쫄쫄쫄’ 나와야 한다. 오른쪽 볼에서 헹굼 수세미로 접시를 닦고 흐르는 물에 헹궈서 물기를 탈탈 털고 설거지통에 차근차근 쫓아야 한다. 대개는 이 루틴을 잘 따라도 늘 미심쩍은 눈초리를 받게 된다.


설거지 루틴은 비단 우리 엄마만의 일은 아니었다. 어느 날은 친구네 집에 초대를 받아 놀러 갔다. 친구가 요리한 감바스를 함께 맛있게 먹고는 내가 설거지를 하려 했는데, 그곳은 그녀의 불가침영역이었다. 


"나는 누구 집에 가서 밥 얻어먹으면 설거지는 해야 한다고 배웠어."

"나는 손님한테 설거지시키는 건 안 된다고 배웠어."

"아니옵니다. 소녀 아무래도 설거지는 해야겠사옵니다."

"에이 참, 그러지 마시래도요."


유교걸 배틀이 잠시 이어지다 내가 이내 물었다.


"너도 설거지 루틴이 있구나. 네 방식이 있는 거지?"

"응."

"그래 그럼 알았어."


오늘도 설거지를 마치고 소파에 깔아둔 전기장판 위에 앉았다. 줄리는 또 쪼르르 쫓아와 전기장판 위에 배를 깔고 누워 눈을 스르르 감는다. 용맹한 줄리 고양이와 달리 절대 부엌에 오지 않는 콩이 고양이는 전기장판 위에 누워있는 줄리를 보고는 소파 위로 폴짝 뛰어올라 줄리 옆에 자리를 잡는다. 집안일도 했고, 전기장판 위에 고양이 수집도 모두 마쳤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끝난다.


'엄마한테 전화나 해볼까? 아냐 그건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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