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형태_01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에게 받던 용돈이 얼마 되지 않던 시절의 기억이다.
그 당시 내 용돈치고 꽤 많았던 천원짜리 지폐를 주머니에 품고 집으로 가던 어느 날, 집 근처에 새로 들어선 호떡가게를 발견했었다. 천원은 내가 PC방에서 한 시간 반을 보내거나, 학교 앞 분식점에서 컵떡볶이와 피카츄돈까스를 동시에 먹을 수 있거나, 문방구에서 불량식품 대여섯개를 사먹을 수 있었던 꽤 큰 돈이었다. 나는 참 놀기 좋아하고 군것질하기 좋아하던 아이였던지라 단 한 번도 내 용돈으로 부모님과 먹을 것을 산다거나 한 적이 없었는데, 그 땐 왠지 모르게 그 호떡가게의 호떡을 사서 집에 있을 아빠와 나눠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 불현듯 가졌던 다짐에 무언가 특별함이 담기길 바랐던지, 나는 일반 호떡이 아닌 한 개에 500원짜리 버블호떡 두 개를 사 집으로 갔다. 집엔 야간 근무를 마치고 아침에 들어와 쉬고 계시던 아빠가 거실에 계셨고, 나는 들뜬 마음으로 아빠에게 호떡을 건냈다. 그러나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아빠는 그 호떡을 받지 않으셨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쩌면 그 서운함의 기억으로 내가 무언갈 덧씌운 것도 있을지 모르지만, 아빠는 오히려 화가 나있었다.
서운했다. 차갑고 꺼슬하게 식어버린 호떡 두 개를 혼자 먹으며 계속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용돈을 흥청망청 써버렸다고 생각하셨을까? 나를 기특하다고 생각하시길 바랐지만 내가 사온 호떡은 그러기엔 모자랐었나보다-하며.
생각해보면 나 또한 아빠의 음식이 달갑지 않은 적이 많았다. 내가 호떡에 걸었던 기대처럼, 아빠는 가끔 치킨과 만두 같은 것들에 무언가 기대를 담아 사오시곤 했다. 아마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가족의 모습을 보고 힘들었을 그 어떤 날의 보상을 받고 싶으셨을 것이다. 아니면 그 소비 자체로, 아빠가 가진 역할에 대한 충족감을 느끼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기대감은 호떡에 남은 내 기억처럼, 한 김 식어 수증기가 맺힌 플라스틱 포장용기처럼, 온전하지 못했다. 아빠가 음식을 사오던 시간은 늘 내가 자야할 늦은 시간이었거나, 짙은 술냄새 만큼이나 부담스러운 아빠의 감정기복이 함께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자고싶었고, 아빠가 불안했다. 그래서 늘 그 음식들은 다음 날 아침까지 부엌 식탁에 차갑게 남아있곤 했다.
아빠와의 음식이 있듯이 엄마와의 음식도 물론 있는데, 그건 굳이 고르자면 엄마의 수제 피자다.
내가 어릴 적 엄만 다양한 요리를 할 줄 알고, 또 하고 싶어하던 분이셨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피자인데, 오븐도 없던 집에서 프라이팬에 구웠던 그 피자는 지금 생각해보니 무엇이 도우의 역할을 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니, 토핑들도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에 남은 건 그 피자를 뒤덮은 두꺼운 치즈였다. 팬에 살짝 눌러붙어 약간 탄 빵과 손에 들고 있기 힘들 만큼 넘치던 치즈. 정확한 모양새도 맛도 가물가물하지만 차고 넘쳤던 그 치즈만이 기억에 남았다. 그 날 이후로 엄마는 더 이상 피자를 만들어주시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아빠가 호떡을 먹지 않았을 때처럼 나는 알 수 없었다.
아빠와 호떡, 엄마와 피자는 이렇게 대체로 일방적인 모습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남은 음식-사랑의 기억은 나의 일부가 되어, 내가 이제껏 느끼고 또 전달하는 관계의 형태를 조성하는 무언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