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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사개미 Nov 24. 2024

나와 사랑의 기억

관계의 형태_02

 처음엔 무조건적이라 믿었다. 그 단어의 힘에 이끌리는 일은 불가결한 것이었고, 그 단어가 지니고 있는 존재성 자체에 의심을 가질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지니고 있는 그 단어에 관한 정의들을 신뢰했고, (비록 다른 이의 정의를 헤아리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내가 주는 것에 있어서는 망설임이 없었다.

언젠가 내가 그 흔들리지 않을 지고한 형태의 단어를 깊이 들여다보았을 때, 그 형태가 만드는 그림자들을 보았고, 무수한 단어들의 이음새들도 보았다. 내가 가진 정의라고 부르던 그것들은 그 모습이 성글고 위태로웠다.


 첫 번째 - 처음 믿었던 그 단어의 존재성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입 밖으로 낼 수 있었다. 입 밖으로 나온 단어의 무게는 아주 가벼웠고 순수했지만, 동시에 그 순수성만큼이나 물들기 쉬웠다. 누군가에게 전해지고 다시 내게 돌아오고 또 내 안에서 맴돌며 탁해져 갔다. 심지어 그 단어가 놓인 기반은 꽤 불안정한 것이어서, 나는 그 위에서 그 단어를 빚는 내내 서투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 가볍고, 서툴고, 탁하지만 동시에 가장 순수했던 단어를 나는 그 시간에, 그 사람에게 내팽개치듯 던져놓곤 잊으려 했다. 변해버린 단어의 모습에 질겁하며.


두 번째 - 이때의 단어는 이기적이고 치기 어린것이었다. 그 어떤 무게도 지니지 않으려 했고, 익숙한 것들에 안주했고, 표현되는 것에 의심도 고민도 없었다. 동시에 나는 이때의 단어를 과거의 망령처럼 두려워했고, 이따금 그 단어를 고민할 때면 설익은 과일을 사치스러운 포장지에 감싸듯 과장되고 그럴싸한 것으로 꾸며냈다. 뭐라도 있는 것처럼, 대단한 고민을 하고 그것이 무거운 것처럼. 언제라도 쉽게 놓아버릴 수 있었으면서 말이다.


세 번째 - 난 나의 단어가 그 나름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서투르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며, 그 단어를 내 마음과 입에 머금을 때면 어느 정도의 무게과 나름의 향취를 지니게 됐다고 느꼈다. 솔직한 말과 마음이라면, 무엇을 전달하고 또 무엇을 듣고 경험하게 되든 괜찮을 거라 믿었다. 각자가 갖고 있던 유약한 허점으로 단단한 신뢰를 만들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생각보다 더 나약해서 쉽게 흔들리곤 했다. 아니 흔들리기보다 그때그때 무너지기 바빴다. 

 무언갈 꽉 쥐고 놓지 않으려 하는 일은 금방 무던해지기 쉽다. 힘을 주고 있다는 감각에 마비되어 움켜쥐고 있는 모양새를 한 손만 남은 채, 수많은 다짐과 약속들을 느슨한 손가락 사이로 흘려버리게 된다. 나는 멍청하게 굳어버린 감각이 내 노력이라고 고집하고 강요했다. 어쩌면 그건 정말 노력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강요한 순간부턴 아니게 됐을 테다. 흘려보내고 무너져버린 나의 흔적이 마치 진흙처럼 바닥에 쌓여갔고, 난 그것을 매번 허겁지겁 원래의 상태, 아니 더 나은 형태로 빚어내보려 애썼지만, 물도, 불도, 유약도 없이 점토만 만져댄다고 종지 하나조차 완성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실패의 기억만 남기는 관계이지만 그럼에도 유지될 수 있던 이유는, 내가 가질 수 없었던 모든 다른 면을 지닌 상대방 덕분이었다. 나는 가져본 적 없던 불을 그 사람은 갖고 있었다. 그 불은 그 단어가 내포할 수 있는 매우 단순한 의미처럼, 열정적이었다. 어떤 방향으로든 말이다. '내'가 무너져 내리고 사방으로 어지럽게 흩뿌려져도, 그 사람은 흩뿌려진 내가 아니라 남아있는 나의 본질을 이해했고, 그 역시 지저분하게 얼룩져 있음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 사람의 열정은 내가 가진 모든 허약함과 강인함에 작용했고, 나는 그 퀴퀴하게 그을린 감정들 속에서 진심을 가려내는 눈을 키웠다.


 수많은 갈등과 실패와 후회와 자학 속에서 내가 잡을 수 있는, 혹은 잡아야 하는 희망의 끄나풀은 나아질 수 있을 거란 막연한 긍정의 타협이다. 그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마비된 감각 사이로 흘려버리겠지만, 수많은 부정과 끊임없이 싸우게 되겠지만, 내 망각은 그 특성 덕분에 단순한 긍정을 양면에 가지고 있기에 또 하루하루의 점토를 쌓아 빚어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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