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쿨하게 살고싶다는 생각을 하는 시절이 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중)
책을 끝까지 읽고 덮었을 때,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분들이 쓴 서평을 찾아보니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꽤 많았다.
정말 그렇다.
이 소설의 주제라고 해야 할까,
교훈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것을 (적어도 나는)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줄거리를 한 마디로 요약해보라고 한다면, 그것조차 어렵다.
음, 전체적인 느낌 정도는 한 마디로 요약해볼 수 있겠다.
'평범한 20대 남자의 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매력있고,
무엇보다 '감각적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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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라는 에세이에서 하루키는
“한정된 소재로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밖에 없더라도
거기에는 무한한-혹은
무한에 가까운-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건반이 여든여덟 개밖에 없어서
피아노로는 더이상 새로운 건 나올 수 없다'는 말은 할 수 없겠지요.
'재료 그 자체의 질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거기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매직'입니다.
일상적이고 소박한 재료밖에 없더라도,
간단하고 평이한 말밖에 쓰지 않더라도,
만일 거기에 매직이 있다면 우리는 그런 것에서도 놀랍도록 세련된 장치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을 했다.
이런 말을 근거로 보았을때,
하루키는 소재 자체의 중요성 보다는
'어떤 소재든 풀어갈 수 있는 능력'이
소설가에게 있어서
중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또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후기에서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처음에도 말했듯 아무 생각없이 쓴 소설이다.
그것이 이 소설의 장점이기도 하고
문제점이기도 하다.”
라는 말을 하였다.
그렇다면,
흥미진진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내용 없이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첫번째 이유는, 독특한 전개방식이다.
1.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다
소설 속 등장인물 중,
어느 누구의 실명도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은 '나'
주인공의 친구를 지칭하는 명칭은 '쥐'
그 밖에 바에서 일하는 사람,
주인공이 잠시나마 좋아했던 여자까지
모두 이름이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실명을 거론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아쉽게도 그 부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나에게 있어서
실명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은 답답함을 주면서
그와 동시에,
주인공에게 완전히 몰입하게 되기보다는
그저 '가상 속의 인물' 이라고 마음속으로 선을 긋게 되었다. 좀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된달까.
2. 라디오에서 나오는 가상의 사연을 아주 길게 풀어썼다
또 다른 에세이에서
하루키는 자기가 라디오를 많이 들었다고 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중간 중간 한 두 페이지를 통째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내용으로 채운 부분이 나온다.
이 부분도 처음 보는 형식이라서 신기했다.
실제로 라디오를 옆에 틀어놓고 책을 읽는 기분이라 나른한 느낌이 들었다.
3. 실존했던 인물과 가상의 인물을 결합하다
소설 속에서 '하트필드'라는 작가가 등장한다.
이 인물이 히틀러의 사진을 품에 안고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렸다고 하길래 궁금해서 찾아봤다.
알고보니 하루키가 가상의 인물을 실존 인물처럼 설정한 것이었다.
소설을 읽고난 후 번역한 사람의 후기를 읽고 알게 된 사실이다.
이러한 장치들이 소설에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데
직접적으로 어떤 이점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새것’ ,‘참신함’, ‘환상적인’ 과 같은
감각을 주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두번째 이유는, 하루키의 문장력이다.
누구에게나
쿨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시절이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나는 마음속의 생각을
절반만 입 밖으로 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유는 잊어버렸지만,
나는 몇 년 동안 그 결심을 실행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나는 나 자산이 생각한 것을 절반밖에 얘기하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버린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이 쿨한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1년 내내 서리제거제를 넣어주어야 하는
구식 냉장고를 쿨하다고 부를 수 있다면,
나 또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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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하게 얘기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정직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정확한 언어는 어둠 속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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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하는 건 무척이나 불쾌한 일이다.
거짓말과 침묵은 현대의 인간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거대한 두 가지 죄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자주 거짓말을 하고,
자주 입을 다물어 버린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1년 내내 쉴 새 없이 지껄여대면서
그것도 진실만 말한다면,
진실의 가치는 없어져버릴지도 모른다.
하루키의 첫번째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하루키의 문체를 있는 그대로
느껴보고 싶은 사람에게 이 소설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