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리뷰
<드라이브 마이 카>를 너무나도 좋아하는 내게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자체로 선물 같았다. 지금까지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처럼 친절함과는 거리가 먼 영화였지만, 이전의 영화들이 그랬듯 긴 여운을 남기는 좋은 영화였다.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이전 작품들과는 다르게 교외 지역의 자연과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시각적으로도 큰 차이가 있지만, 이전 영화들에서 다뤘던 이야기들보다 좀 더 거대한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도 조금은 낯선 영화기도 했다. 물론 기분 좋은 낯섦이었고,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만의 스타일도 여전히 짙게 남겨진 영화라는 점에서 영화팬으로서 굉장히 반가운 영화였다.
음악에서부터 시작한 영화
영화에 대한 검색을 통해 알게 된 것들 중 하나는 이 영화가 음악감독의 제안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도 음악 감독을 맡았던 ‘이시바시 에이코’ 감독이 라이브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어떤 음악에 대한 영상 자료를 하마구치 류스케에게 부탁했고, 그 제안의 영상을 촬영하는 도중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 영상을 영화로도 만들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즉, 영화는 ‘음악’에서 시작된 영화라는 점에서 독특하고, 의도되지 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우연’의 테마에 관심이 많은 ‘하마구치 류스케’ 다운 선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 제작의 시작이 되었을 그 음악은 실제로 영화에서 굉장히 부각되어 있다. 어딘가 서늘하기도 하고, 따듯하기도 한 느낌을 주기도 한 영화의 핵심 테마 음악은 영화에서 펼쳐지는 어느 마을에서의 이야기가 주는 알 듯 모를 듯한 묘한 감상을 그대로 닮아있다. 영화 중간중간 주제 음악과 함께 펼쳐지는 숲 속의 모습, 설원의 장면, 고즈넉한 산책의 모습들도 인상적이지만, 무엇보다 음악 그 자체가 주는 강렬함에 압도되었다. 다소 충격적이고도 무슨 일인지 분간할 수 없는 마지막 장면처럼, 이미지부터 음악, 대사들 또한 어느 것 하나 명료하지 않아 더욱 매력적인 영화로 느껴졌다.
정말로 영화는 음악으로 시작해 음악으로 끝을 맺는다.
중요한 것은 '균형'
영화의 전체적인 이야기는 복잡하지 않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도쿄에 위치한 연예기획사가 보조금을 얻을 목적으로 도시 외곽의 한 마을에 글램핑장을 설치하려고 하고, 마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 합리적인 이유로 그것을 반대한다는 것이 주된 이야기이다. 다만, 단순한 이야기와는 다르게 조금은 난해한 연출 방식 때문에 이야기 속에 숨은 진의를 파악하는 것이 쉬운 영화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영화의 제목과 연결 지어 생각해 봤을 때, 영화는 자연에서 펼쳐지는 것들에 인간이 개입했을 때 벌어지는 이야기라고 받아들이게 되었고, ‘자연은 선과 악 같은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자연을 인간의 시선으로 판단하고 이해하려는 행동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영화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마을 근처에 사슴을 사냥하는 사냥터가 있음에도 마을은 그것을 크게 개의치 않는다. 반면에, 영화에 새로 들어서게 될 글램핑장은 글램핑장의 부지가 사슴들이 다니는 길에 위치하고 있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주인공인 ‘타쿠미’가 설명회에서 말했던 것처럼, 사냥터와 글램핑장의 차이는 아마도 ‘균형’ 일 것이다. 자연의 입장에서 보자면 모든 인간은 명백히 ‘외부인’ 일 것이다. 자연은 끊임없는 도전을 받는 존재이며, 그렇기에 보존과 파괴, 이 둘 사이의 균형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대략 5분 정도로 느껴졌던 영화의 긴긴 오프닝 시퀀스는 나무들이 빼곡한 숲의 바닥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점을 롱테이크로 보여준다. 동시에 흐르는 음악에는 숲의 온기가 느껴지는 동시에 겨울의 계절감이 주는 서늘함도 함께 가지고 있다. 오프닝 시퀀스와 거의 동일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은 안개가 가득한 설원 너머의 숲 속의 모습이자, 상처 입은 사슴이 몸을 피해 도망가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렇듯 영화는 여러 방식을 통해 자연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신화적으로 느껴지도록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대자연 속에서 버둥거리는 인간의 무력함과 상처받은 자연의 거대한 슬픔이 동시에 느껴지는 신화적인 영화라고 이해했지만, 관객들의 생각에 따라서는 스릴러, 공포영화, 혹은 자연이 인간을 심판하는 영화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모든 영화, 특히 좋은 예술은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기 마련이다. 그 어디에도 정답은 없다.
상류는 하류에 미칠 영향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들은 좋은 대사들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번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대사는 더욱 좋았다. 대사의 양이 적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전체를 이해하게 만드는 강렬한 문장들이 많았다. 예컨대 마을에 글램핑장이 들어서는 것을 요목조목 이유를 들어가며 반대하는 주민들의 대사라던지, 도쿄에서 마을로 이동하는 도중 남자 직원과 여자직원과의 대화 등, 대단할 것 없는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묻어나는 인물들의 상황과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특히 마을 설명회 장면에서의 마을회장의 대사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아이디어이자, 영화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을 주는 가장 인상적인 대사였다. ‘상류에서 벌어진 일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반드시 하류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상류에 사는 사람들은 하류에 사는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해야 하며,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라고 일갈하는 마을회장의 말은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무책임한 태도를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고, 다음 세대에 대한 윗세대의 책임을 뜻하기도, 도시 외곽의 작은 마을에 대한 대도시의 책임을 뜻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영화에서 많은 사건과 요소들은 ‘상류’와 ‘하류’로 구분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마을 사람들이 거주하는 집의 위치를 상류와 하류로 구분할 수 있으며, 글램핑 장을 설치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연예기획사 내부의 권력관계를 상류와 하류로 구분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주인공 ‘타쿠미’는 작은 마을에 흐르는 강물의 상류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마지막에 그가 내리는 선택과 행동들은 자연 그 자체가 현현(顯現)한 듯한 인상을 준다.
거대한 자연의 행동을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 영화의 제목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바꾸어 지어도 결코 이상하지 않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자면, 영화의 마지막은 분명 비극적인 동시에 혼란스럽다. 그러나 수많은 죽음과 생명이 순환하는 자연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사슴 한 마리가 죽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멀리 떨어져 관망하는 카메라의 시선처럼 자연은 그저 그것을 관망할 뿐이며, 우리는 그 시선에서 서늘함을 느끼지만 그조차 인간이 느끼는 감정 중 하나일 뿐이다.
검은 숲으로 걸어 들어가 어둠과 하나가 되어 사라지는 ‘타쿠미’의 모습처럼, 대자연의 관점에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