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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부와약초꾼 Oct 25. 2022

여성만의 돌봄노동 대물림은
사양합니다

청년여성농민의 삶

‘엄마는 왜 주말에도 일해!?’ 토요일에 이어 일요일까지 내처 일하려 하니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초등학교 2학년 아이 입장에서는 토요일엔 자기가 일하는 엄마 옆에서 기다려 주었으니 일요일은 같이 놀아주겠거니 했는데, 엄마는 간만에 장맛비가 멈추었으니 밭 정리할 일이 시급하여 자기 마음을 전혀 몰라주니 성이 나서 따져 묻는 것이다. 아이의 토라진 마음에 서글픔도 느껴져서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농사짓는데 주말이 어딨냐’ 고집하고도 싶었지만, 엄마와 같이 놀고 싶은 어린 시절도 한 때 아닌가 하며 일해야겠다는 마음을 접었다. 


 그래도 콩대가 길어 나자빠진 물레콩과 연일 습하여 곰팡이의 밥이 되어 버린 붉은어금니동부콩과 덩굴을 관리하지 못해서 온 밭을 장악해버린 청호박이 아른거린다. 차일피일 뒷전이 되어버린 밭의 꼴이 꼭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영 마음 한구석이 상한다. 그래도 당장 원성이 자자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내 시간을 차지하기 일쑤다.


 농사와 육아는 생명을 다루는 다차원적인 일이지만, 감히 말하자면 육아는 농사보다 훨씬 까다롭다. 9살, 7살 아이들의 발달과 이제 갓 돌이 지난 막내의 성장 시기에 따라 각기 필요한 것들이 다르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나이와 수준에 맞는 적절한 활동과 경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유자녀 여성농민의 시간은 절기를 따르는 농민의 삶이 못되었다. 


 처음 농사에 도전할 때만 해도 해가 진 저녁 시간과 해가 너무 뜨거운 낮에, 그리고 농한기에 누릴 수 있는 시간의 자유에 대한 나름의 로망이 있었지만, 아이를 낳고 시가에 살면서 삼대가 함께 살아보니 오롯한 시간을 음미할 여유를 도통 가지지 못하였다. 등교를 챙기다 보면 해가 뜨거운 낮에 밭으로 나서야 하고, 하교 후에 식사와 숙제를 챙기다 보면 해가 진 저녁도 분주했다. 농한기에 아이들은 방학을 맞이하니, 오히려 개학하는 농번기를 기다릴 정도였다. 


 

게다가 내가 나의 시간을 찾으면, 내 역할을 대신해 줄 사람은 보통 시어머니셨다. 내가 부족한 부분은 그만큼 어머님이 대신 더 고생하게 되는 구조라 혹여 다른 바쁜 일로 집안일에 소홀하게 되면 죄책감이 생겼다. 시모가 함께여서 너무나 다행이었지만, 동시에 불편함도 자리했다. 집 안에 양육과 돌봄을 담당하는 순위가 있다면 1순위가 며느리와 시어머니였다. 나는 남편과 가사일을 나눈 것이 아니라, 어머님과 함께 하고 있었다. 


 ‘어머님처럼은 못살거에요’ 혀를 내두를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지게질도 잘하셨고, 칡 같은 약재를 작두로 잘 써리시고, 몇 십인분 요리도 뚝딱 해치우셨던 잔뼈 굵으신 집 안팎으로 살림꾼이셨다. 그 댓가로 마른 기침과 어깨와 허리에 묵직한 만성 통증을 짊어지고 계셨다. 사실 나 역시 그 당시에는 시가살이에 어렵사리 적응 중이라 죄송하게도 시어머니의 희생과 배려에 대해 깊이 생각을 못했더랬다. 


 철저하게 가부장제 관계 속에 매인 시간 속에서는 그 너머를 볼 시야가 가려진 채, 이 관성의 굴레를 헤어나올 에너지를 찾지 못하여 악순환의 대물림 속에 있었다. 결코 시어머니의 노동 강도를 내가 대물림 할 수는 없을 것이고, 내 노동 강도를 여성들과 나누어야 하는 한계를 깨야 했다. 가사와 아이를 돌보는 일이 여자만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오래된 관념은 무너졌지만, 실제로 모두가 그렇게 살아내지는 않는 것 같다.


월든 호숫가에 소로우의 밥과 빨래는 그의 어머니가 해줬다고 한다. 자립을 실천하던 소로우는 자신의 집안 살림을 왜 엄마에게 미루었을까,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을까? 엄마가 성인이 된 자식의 밥과 빨래를 해주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지는 않기를. 



내 자식만은 농사 짓지 말기를 바라며 어쩔 수 없이 농사를 지어 오셨던 부모들과 ‘엄마처럼 살기 싫어!’ 하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고 싶어 하는 자식들의 마음을 가까이 보아왔다. 다른 듯 비슷한 것이 있다면 자기 삶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었다는 점이 아닐까. 나는 한 농부와 엄마로서 자식들에게 대물림될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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