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보77' 보드게임 대 역전극
금요일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보드게임하는 시간입니다.
이날 수업하러 오는 학생들의 얼굴은 환한 보름달입니다.
수학 냄새가 많이 나는 게임 '로보 77'
두 자릿수 + 한 자릿수 정도는 암산이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한 제가 의도적으로 고른 게임이지만
연산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재미있어서 아이들도 좋아합니다.
게임 방법은 간단합니다. 카드 다섯 장, 생명칩이라고 하는 하늘색 칩을 3개씩 가져갑니다.
자신의 차례가 되면 카드의 한 장을 버리는 카드 더미에 내려놓습니다. 이 때, 지금까지의 합(앞 사람이 말한 수)에 자신의 카드에 적힌 수를 합을 말합니다. 합이 11이 배수, 즉 11, 22, 33, 44, 55, 66을 되면 생명칩 한 개를 빼앗기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또, 합이 77이거나 77보다 큰 수를 말하면 역시 생명칩 한 개를 뺏기면서 게임이 종료됩니다. 이렇게 생명칩을 빼앗기다가, 더이상 내어 줄 생명칩이 없을 때 게임에서 탈락합니다. 이 말은 생명칩 3개를 잃었다고 해서 탈락하는 게 아니라 생명칩 3개를 잃은 후 다시 한번의 기회가 있습니다. 이번에도 생명칩을 내 놓아야 한다면, 줄 게 없으므로 게임에서 탈락하게 됩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플레이를 계속하다가 마지막까지 탈락하지 않은 사람이 승리합니다.
대부분의 카드는 0부터 10까지의 평범한 수이지만 66, 47, 76 같은 높은 수도 있습니다. 이런 수 카드 외에 -10, x2, 방향바꾸기 이렇게 3종의 특수카드도 있답니다. -10은 합에 -10을 하면 되고, x2는 다음 사람이 카드 두 장을 내야 합니다. 방향바꾸기는 게임하고 있던 방향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특수 카드때문에 게임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60 이상의 높은 수를 내려놓으며 승리를 꿈꾸지만 방향바꾸기에 위기가 찾아오는 경우도 있고, -10카드나 0카드때문에 높은 수의 카드를 낸 친구가 생명칩을 잃은 경우도 종종 생깁니다. 이런 재미로 게임을 하겠지요.
이 날은 슬이, 현이, 송이 셋이서 게임을 했습니다. 게임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이 됩니다. 아직까지는 합이 11의 배수인 수들을 말해서 생명칩을 뺏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11, 22, 33, 44, 55, 66이라는 말을 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합을 말합니다. 말하는 순간 아차합니다. 강사들끼리 게임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아직까지 이런 자잘한 실수없이 덧셈을 잘 하고 있습니다. 합을 잘못 말해도 생명칩을 잃도록 했으므로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어야 합니다. 틀리게 합을 말하는 지, 또 자신의 합을 맞게 말하기 위해서도 잘 들어야 합니다. 물론 셋이 모두 모르고 지나가면 어쩔 수 없지요. 몇 라운드 진행하는 것을 보고, 집중력 좋다고 칭찬 한마디 하고 전 떨어져서 게임을 구경했습니다. 자잘한 실수가 없으니 대부분 77이 넘어서 칩을 잃습니다. 그러니, 좋은 카드는 모아둬야 위기의 순간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조금 후에 결국 현이가 생명칩 3개를 잃고는 제게 왔습니다.
"선생님, 저 생명칩을 다 냈어요!"
제가 말합니다. "방금 세 번째 생명칩 준거야?"
생명칩을 다 잃은게 속상한 건지 자기만 이제 게임을 못한다는게 속상한 건지 아이는 말합니다.
"네. 탈락했어요."
생명칩 3개를 잃어서 탈락한 게 아니라 낼 게 없으면 탈락한다고 몇 번을 강조했는데도, 이렇게 저한테 옵니다. 게임방법 중에 이런 작은 부분은 상황이 되어야만 알 수 있는 것도 있어요.
"아니야. 얼른 가서 해. 내어 줄 생명칩이 없을 때 탈락이라고 헸잖아. 아직 한번의 기회가 있답니다."
알겠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이미 진 게임이라고 하면서 내키지 않은 듯 돌아갑니다.
게임하러 돌아가는 현이의 표정은 이미 졌다는 표정입니다.
"게임은 끝까지 하라고 했잖아. 누가 이길지 모른다고...
무슨 일이든 끝까지 해보지 않고는 몰라..."
모두가 들으라는 듯 저는 말했지만 아이들은 제 말을 믿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다시 게임을 시작합니다.
생명칩이 2개씩 남은 두 아이와 이제 마지막 게임을 하는 현이가 다시 게임을 시작했습니다.
전 아직도 멀리 떨어져서 아이들이 게임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아이들이 풀어놓은 문제를 채점합니다.
새로운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선을 잡은 송이가 아마도 마지막일 수도 있는 현이를 탈락시키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처음부터 큰 수를 냅니다.
"55!"
자신 있게, 웃으면서 큰소리로 냈습니다. 11의 배수입니다. 생명칩을 잃어야 하는 행동이에요.
저도 채점하던 문제집에서 고개를 들고 조용히 아이들을 바라봤습니다. 슬이와 찬이가 모르고 지나쳐도 전 그냥 두고 볼 참입니다. 말했듯이 셋이 모르고 지나가면 끝입니다. 그리고, 다음 사람이 자기의 차례를 진행하면 그때야 전 아이들이 뭘 놓쳤는지 알려줄 겁니다.
(단체 수업, 특히 저학년 수업에서는 말을 해요. 55는 11의 배수이고, 생명칩을 줘야한다고.
하지만 고학년들이고, 개인수업이니 두고 봅니다.)
"야, 55는 11의 배수잖아. 생명칩 1개 줘야 해"
"아~~"
다행히 두 아이가 생명칩을 주라고 말합니다.
55라고 말한 친구는 잠깐 멍하더니 아!하는 표정입니다.
한 친구는 생명칩을 잃고, 현이의 표정은 갑자기 자신감이 생긴듯 합니다.
마지막 77이 넘으면서 송이가 생명칩 한 개를 마저 잃고 0개가 됩니다.
"와 난 바퀴벌레로 부활했어."
갑작스러운 바퀴벌레 부활이라니.. 아마도 아이들은 생명력이 뛰어난 곤충이 생각났나 봅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했던 라운드에서 계속 탈락하지 않고 이어가던 현이는 결국 자신을 바퀴벌레에 비유하며 다음 라운드를 이어갑니다.
"선생님. 나 탈락했어요."
결국 처음으로 탈락하고 내게 온 아이는 송이입니다.
55가 큰 실수가 되었네요.
참 다행스러운 건 이게 게임이니, 그 실수를 다음에는 하지 않으면 됩니다.
실수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돌아볼 수 있는 것도 보드게임의 장점 중 하나이지요.
송이는 자신이 탈락했다는 것만 말해주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고 다음 라운드를 구경합니다.
아직 살아남은 생명칩이 없는 현이와 생명칩이 1개 남은 슬이 둘이서 게임을 합니다.
이젠 두 번만 이기면 승리한다고 하면서, 현이가 카드를 내려놓으며
"이제 그만 끝내주겠어. 76!"
이라고 하며 합을 말합니다.
현이는 76!이라고 말한 친구는 이길 수 있다는 표정으로 슬이를 봅니다.
그러나, 슬이는 환하게 웃으면서 카드를 내려놓습니다.
"나에게 이것이 있다!"
하면서 -10을 내려놓네요. 66!이라고 하면서요.
이와 동시에 현이는 만세를, 슬이는아차! 하는 표정을 짓습니다.
저는 그만 크게 웃고 말았습니다. 66! 11의 배수이네요.
로보 77 게임하면 꼭 한 번씩 나오는 이 실수... 오늘도 구경을 합니다.
76! 이런 경우 참 난감합니다. 대부분 이럴 때는 특수카드를 이용하면 좋습니다.
둘이서 게임을 하니 방향바꾸기(합은 그대로 76!이라고 말합니다)를 내면 방금 76을 말한 친구가 다시 카드를 내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아니면 x2 카드가 있다면 합은 그대로76! 상대방이 카드 두 장을 내야 하므로( 그 중에 첫 카드는 꼭 수카드여야 한다) 자신은 위기에서 벗어나면서 상대방을 위기에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10카드가 있는데요. 이 카드는 좋은 카드인 것 같지만 절대 내면 안됩니다.
76에서 -10을 내면 66! 11의 배수이니 생명칩을 잃게 되지요.
특수카드가 없다면 0카드가 있어야 할 텐데요. 방향바꾸기, x2카드, 0 카드가 없다면 어떻게든 게임종료와 함께 생명칩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슬이씨, 선생님이 아까 말했잖아. 합이 76일 때는 -10 하면 66이어서 생명칩 뺏기니 조심하라고,..."
이제 둘 다 생명칩이 없으니 이번이 마지막 판입니다.
둘다 집중해서 마지막 게임을 즐깁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저와 다른 친구도 누가 이길지 궁금합니다.
핑퐁 탁구처럼 이기기 위해 최대한 두 아이는 수를 냅니다.
높은 수를 내기도 하고, x2 카드로 상대방이 카드 2장을 내게도 합니다.
결국... 77이 넘으면 슬이가 내어줄 생명칩이 없어 탈락, 현이가 승리했습니다.
이건 저도 예상할 수 없는 승리입니다. 현이가 몇 번 하다가 탈락할 것이라고 생각했지 계속해서 승리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이렇게 대 역적극을 보는데도 전 이럴 수도 있다는 것을 잊고 지냅니다. 다시 한번 더 해보자는 생각을 하지 못하지요.
"와... 이겼어요. 한 번이면 끝났는데, 계속 이겨서 살았어요."
현이를 보면서 알고 있었다는 듯 제가 말합니다.
"거 봐라. 게임은 끝까지 해봐야 안다고 했지?"
슬이도 옆에서 지켜보다가 말을 합니다.
"선생님. 현이이 대단해요. 금방 탈락할 것 같았는데 계속 해서 이겼어요."
마지막까지 한 슬이가 혹시 서운할까 싶어 얼굴빛을 살폈는데, 웬걸요.
이럴 수도 있구나 하는 표정입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이 생기면 슬이도 분명히 끝까지 할 것입니다. 결과야 알 수 없는 거구요.
오늘 게임한 이 친구들은 무엇이든 (문제를 풀든, 게임을 하든) 포기를 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있다는 제 말의 뜻을 조금은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전 학생들이 즐거워하는 보드게임을 통해 학습의 효과를 얻기도 하지만, 삶에서 필요한 자질구레한 자질들을 배우도록 하고 싶습니다.
내가 패배해 보니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아, 그러니 친구도 그럴 것 같아, 난 승리해서 기분이 너무 좋지만 친구 앞에서 마구 자랑을 하지 않겠어. 공감과 배려
패배하기도 하고 승리하기도 하는 게임에서 이겼다고 만세를 부르고 졌다고 화를 내고 짜증을 내지 않도록 행동해야 하는 평정심.
게임을 진행할 때 내가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면 빨리 내 전략도 바꿔야 하는 민첩성
다른 친구들이 게임하는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는 열린 마음
그리고, 이번 게임에서 어떤 부분은 잘 했는데, 어떤 부분에서는 아쉬웠고 다른 친구를 보니 여기에서 이렇게 하는 게 좋았던 것 같으니 나도 한 번 그렇게 해 봐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자기 성철
협동게임에서 내가 잘한다고 내 의견만 내세우지 않고 같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서, 자기가 모두 주도하지 않은 상대방에 대한 믿음과 의사소통, 그리고 협력
마지막으로 리더십
무엇보다 중간에 다 진 게임인 것 같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근성... 승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졌다면 그만큼의 자기만족도가 높아지는 것을 느낍니다(가끔 분하기도 하겠지만요)
이 외에도 더 많은 것을 게임을 통해 배우게 하고 싶습니다. 아니요. 사실은 스스로 터득해갑니다.
이번에 이 친구들 셋은 분명히 알게 되었을 겁니다.
"완전히 질 때까지는 진 게 아니다. 최선을 다한다면? 어쩌면 역전도 가능하다.
그러니, 절대 포기하지 말자."
무슨 게임을 이렇게 비장하게 하냐고요?
게임에서 나온 행동은 그냥 게임에서만 나오는 행동은 아니고 자신의 성격에서 나오는 행동이기때문입니다. 오늘은 저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다시 한 번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