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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연 Dec 15. 2023

게슈탈트 붕괴 현상

고2 겨울 야자 시간이었다. 입시를 앞둔 우리는 거대한 긴장감 앞에 늘어져 있었다. 밤 8시를 넘긴 시간, 나와 내 대각선에 앉은 친구는 공부와 관련 없는 대화에 빠져 있었다. 친구는 뒤쪽으로 45도쯤 의자를 기울인 채 내게 게슈탈트 붕괴 현상이라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한 단어를 반복하여 말하거나 생각하다 보면 그 단어가 낯설어지는 현상이 있다고. 낯설어지다 나중에는 처음 보는 단어처럼 느껴질 거라고 했다.


나는 난로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았다.


난로

난로

난로 난로


순간 난로라는 단어에 심한 이질감이 들었다. 발음 기호처럼 날로라고 읽혔다가, 난과 로 사이 여백이 생겼다. 이러다 정말 친구의 설명처럼 단어 하나를 잃어버릴 것 같았다. 우리는 마치 정신 의학의 한 현상을 목도한 것처럼 두려워했다. 


그 후 살면서 나는 여러 번 게슈탈트 붕괴 현상을 느꼈다. 이불, 촛농 등 평생을 불러 온 단어들이 돌연 다른 얼굴로 나를 마주했다. 그때마다 나는 게슈탈트 붕괴 현상이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이것은 과학으로 증명된 심리적 현상이고, 난 이미 겪은 적도 있으니 별별 일이 아니라고. 낯설어진 단어를 천천히 몇 번 더 불러 주는 시간으로 다시 익숙해질 수 있다고 생각도 해 가며.  


얼마 전 의자를 45도쯤 기울였던 친구와의 통화에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사실 게슈탈트 붕괴라는 현상은 없다는 것이었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글에는 게슈탈트 붕괴 현상이라고 소개되는 상태나 연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나와 있었다고 했다. 누군가가 인터넷에 퍼뜨린 괴담이었던 것이다. 나의 당연한 착각들이 부정당하는 순간이었다. 그럼 우리가 느꼈던 단어와의 일시적 거리감은 무엇이었을까? 붕괴된 것은 게슈탈트라는 어려운 단어가 아닌 그간 내가 느꼈던 오인의 위약 효과였다.


사실은 붕괴되지 않는다는 게슈탈트, 그렇다면 나는 또 어떤 허구를 앓고 있을까. 존재하지 않는 어떠한 것을 경외하며 살았을까. 웃음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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