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이 폴란드 민족주의 세력을 말살시켰다는 새빨간 거짓말과 반론 근거
지난 2024 7월 필자는 이탈리아와 폴란드를 여행했다. 주로 이탈리아에서 머물렀지만, 폴란드도 방문했다. 7월 28일 저녁 비행기로 이탈리아 앙코나에서 폴란드 크라쿠프에 도착했고, 크라쿠프에서 새벽 2시에 버스를 타고 수도 바르샤바로 향했다. 28일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르샤바를 여행했고, 다음 날인 29일 오후 4시에 기차를 타고 다시 크라쿠프로 내려와 크라쿠프 중심가에서 야경을 구경했다. 다음날인 31일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여행했으며, 이후 크라쿠프 시내를 돌아다녔다. 8월 1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다시 이탈리아 앙코나로 돌아감으로써 폴란드 여행을 끝냈다.
폴란드 바르샤바를 1박 2일밖에 여행하지 못한 게 아쉽지만, 그래도 여행 자체는 의미 있고 즐거운 추억이었다. 바르샤바에 도착한 29일 필자는 폴란드에 있는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에 갔었다. 아마 오전 11시에서 정오가 되는 시점이었다. 사실 폴란드야 현재 러우전쟁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열심히 하고 있고, 또 반소련 및 반러시아 감정이 매우 강한 나라이기에 박물관 또한 반소적인 관점일 거라 막연히 예상했다. 그러나 그 예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 현재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에 전시된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독일도 나쁜 놈이지만, 소련이 더 나쁜 놈이고 더 악독하다.”이다. 독일에 대한 비판은 무미건조한 데에 비해, 소련에 대한 비난이나 비판은 너무나도 강력했다. 이것이 필자가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에 가서 진지하게 느낀 점이다.
참으로 경악스러웠던 것은 소련에 대해 긍정적인 내용이 박물관에 단 하나도 없었는데, 역사적으로 존재한 사실조차 기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련이 바르샤바 봉기 당시 항공수송으로 물자를 봉기군에게 투하한 사실은 단 한 줄도 박물관에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폴란드에서 한 토지개혁의 경우 단기간에 성공적으로 마친 일이었음에도 폴란드의 지주계급이 공산당에 의해 재산을 몰수당한 것에 대해서만 강조했다. 심지어 박물관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의 역량을 약화시켰던 것처럼 설명했다. 그리고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에 대해서도 마치 나치 독일과 소련이 군사적 동맹을 맺은 것처럼 악의적인 왜곡도 서슴지 않았다. 오늘은 바르샤바 봉기에 대한 폴란드 극우 반공 내러티브와 서방 학계의 전통주의적 내러티브에 대한 반박 해보고자 한다.
바르샤바 봉기는 1944년 8월부터 10월까지 수도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민족주의 세력과 민중들이 나치에 대항에 일으킨 투쟁이었다. 대략 두 달간 전개되었으며, 폴란드 민족주의 세력이 주도했다. 바르샤바 봉기를 알아보기 전에 우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 역사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1939년 9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폴란드는 나치에게 점령당했었다. 독소 불가침 조약에 따라 소련도 폴란드 동부를 접수했고, 이때 접수한 영토 일부가 소련 연방 중 하나였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편입되기도 했다. 폴란드 침공 이후 폴란드군 일부 잔존 세력들이 나치 치하의 폴란드를 벗어나, 궁극적으로 영국으로 가서 망명정부를 세웠다.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샤를 드골이 영국 런던에서 자유 프랑스 망명정부를 세웠듯이, 폴란드군 잔존 세력 또한 영국 런던으로 가서 망명정부를 세웠었다. 폴란드 망명정부를 세운 사람으로는 브와디스와프 라치키에비치와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중장이 비교적 유명하다. 영국에 결집한 폴란드 망명정부의 군대는 대략 10만 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이들 중 일부는 항공기 조종사로서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RAF 소속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1939년 소련이 접수했던 폴란드 영토는 신속히 독일이 점령하게 됐다. 사실 1939년 소련이 접수한 동부 폴란드의 경우 친소주의자들도 제법 있었는데, 이들의 경우 소련군에 협조했다. 실제로 독소전쟁 당시인 1943년 폴란드 인민군이 창설되었고, 이들은 바르샤바 해방 작전과 베를린 공방전 등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한 이후 폴란드에는 망명정부의 지원을 받는 지하조직들이 제법 있었다. 나치는 폴란드 점령 이후 유대인 학살을 벌였는데, 전쟁 기간을 통틀어 폴란드 유대인 300만 명이 학살당한 걸로 알려졌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만 110만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고 나치 치하 폴란드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폴란드에는 나치가 유대인을 분리하기 위해 만든 공간인 게토가 있었는데, 1943년 게토에서 유대인들이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바르샤바 게토 봉기다. 게토 봉기는 1943년 4월 19일부터 5월 16일까지 진행됐는데, 나치의 봉기 진압으로 총 1만 3,000명의 유대인이 사망했다. 많게는 2만 명까지도 추산한다. 이 중 절반 이상은 산 채로 불에 타거나 질식사했다고 한다. 이때 나치가 동원한 병력은 무장 친위대(SS)였고, 규모는 2,000명 정도였다. 이때 살아남은 사람 4만 9,000명은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되어 절대다수가 목숨을 잃었다.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나기 1년 전에 이미 봉기가 있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폴란드 망명정부 세력은 바르샤바 쪽 지하조직과 연락망을 형성했고, 바르샤바 게토 봉기 1년 후인 7월 지하조직들에게 대규모 봉기를 일으킬 것을 지시했다. 봉기는 8월 1일에 시작됐다. 타데우시 부르 코모로프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국내군 2만 명이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를 한 이후 봉기군의 병력은 거의 5만 명까지 늘었으며, 폴란드 공산주의자들도 정파를 초월하여 봉기에 가담했다. 봉기를 일으킨 폴란드 국내군은 바르샤바에 있던 독일 수비대 일부를 제압하고 도시 중앙을 장악했지만, 결과적으로 전차와 대포 그리고 항공 병력을 동원한 독일군에게 궁극적으로 진압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기는 2달 동안 진행됐으며, 10월 2일이 되어서야 모든 전투가 중지됐다. 바르샤바 봉기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바르샤바는 평온해져야 한다! 지구상에서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명령했다. 마찬가지로 SS 총지휘관인 하인리히 힘러도 “이 도시는 지구에서 사라져야 한다. 단지 국방군을 위한 열차역만 남기고 나머지는 돌 한 조각 남기지 마라! 모든 건물은 기초까지 없애라!”라고 했다.
독일은 1944년 바르샤바 봉기 기간에 도시의 60%를 파괴했고, 이후 더 파괴하여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해방했을 시점에는 도시의 85%가 파괴된 상태였다. 바르샤바 봉기 2개월 동안 나치는 도시를 파괴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독소전쟁 당시 세바스토폴 공방전에 투입했던 600mm의 칼 자주포까지 투입했으며, 다연장로켓도 발사했다. 그리고 급강하 폭격기를 동원해 도시를 폭격하기도 했다. 나치는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봉기 기간 두 달 동안 학살당한 바르샤바 민간인은 20만 명이 넘었다. 이 중 5만 명은 봉기 초인 8월 5일부터 11일 1주일도 안 되는 기간 동안 학살당했다. 8월 5일 당일에만 나치는 민간인 1만 명을 학살했다.
바르샤바 봉기 당시 소련군은 폴란드 영내에 진입한 상황이었지만, 바르샤바 봉기가 끝나는 시점까지 바르샤바로 진입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서구 학계는 오랜 기간 동안 바르샤바에서 벌어진 참사의 책임을 스탈린이 의도한 것으로 얘기했다. 물론 2025년 현재도 폴란드 정부는 그러한 내러티브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심지어 영국에서 좌파운동을 하고 있는 수정 트로츠키주의자인 도니 글룩스타인도 이러한 서구의 학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심지어 바르샤바 봉기가 스탈린이 폴란드 민족주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다고 믿는 윈스턴 처칠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기까지 한다. 영국의 제국주의자이자 극우 반공주의자인 윈스턴 처칠은 실제로 “스탈린이 직접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을 제거하는 대신 독일군이 그들을 없애 버리도록 내버려 두었다.”라고 믿었었다.
그러나 바르샤바 봉기 당시 소련군이 진격하지 못한 진실과 가려진 진실은 이런 서구의 내러티브와 다르다. 사실 1944년 여름에 일어난 바르샤바 봉기는 소련군의 진격을 돕기 위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목적부터가 진격을 미리 막기 위해 추진됐다. 봉기한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은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해방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들은 폴란드 내의 공산주의 조직인 폴란드 민족해방위원회를 경계했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바르샤바 봉기를 설명할 때, 생각보다 강조되지 않으며 의도적으로 얘기하지 않는다. 그래야 바르샤바 봉기라는 주제에서 소련에 대해 책임을 훨씬 더 많이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소련이 그 당시 바르샤바로 진격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군사적인 측면의 문제였다. 나치가 자신들이 점령한 바르샤바를 불태우고 폭파시키고 있는 동안 소련군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44년 8월 초 소련군은 시 접근로 상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비수아 강 너머의 작은 교두보들이 독일군의 격렬한 공세를 받았다. 폴란드 북쪽에서는 폴란드 수도로 가는 또 하나의 길을 열어 주었을지도 모를 부그 강과 나레프 강의 교차 지점을 놓고 양쪽이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당시 폴란드 해방을 지휘했던 소련의 로코솝스키 장군은 1944년 8월 하순 영국인 전시 통신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봉기는 오로지 우리가 바르샤바에 바야흐로 진입하려고 하는 시점에 일어날 때에만 이치에 맞을 것입니다. 그 시점은 어떤 단계에도 이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뒤로 밀렸습니다.”
이후 게오르기 주코프가 스탈린에게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9월 초순에 바르샤바 전선에 파견되자, 상황을 살펴본 주코프는 비수아 강을 아직 대거 도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스탈린이 바르샤바 봉기에서 의도적인 민족주의 말살을 바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을까? 이것 또한 역시 없다. 1944년 8월 22일 윈스털 처칠과 루스벨트가 물자 투하 요청을 하자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답변을 남겼다.
“조만간 권력을 좇아 바르샤바 모험을 벌인 한 줌의 범죄자들에 대한 진실이 드러날 것입니다. 군사적 관점에서 볼 때 상황은 붉은 군대와 폴란드인들 모두에게 매우 불리합니다. 그럼에도 소련 부대는 히틀러의 진격을 물리친 다음 바르샤바 인근에서 새로운 대규모 공세를 벌이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는 붉은 군대가 바르샤바에서 독일군을 분쇄하고 폴란드인들을 위해 도시를 해방시키는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귀하께 장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반나치 폴란드인들을 효과적으로 돕는 최선의 방법일 것입니다.”
당시 스탈린이 처칠과 루스벨트에게 한 답변 그 어디에도 폴란드와 집단서방의 내러티브가 주장하는 내용 같은 건 없다. 최근 학계의 연구의 경우 소련이 그 당시 바르샤바에 진격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군사적 측면에서 공세 종말지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라 보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로코솝스키나 주코프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소련군이 1944년 6월부터 8월까지 바그라티온 작전을 수행하면서, 상당히 많은 병력을 손실했기 때문이었다.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소련군은 총 167만 명의 병력과 5,700대의 전차, 32,718문의 포와 7,800대의 항공기를 투입했고, 작전 기간 동안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나온 상황이었다. 총 18만 명이 전사했고, 59만 명이 부상당했으며, 전차도 3,000대를 잃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사실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소련군은 바르샤바 해방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가 작전 후반 부에 바르샤바 해방이라는 목표가 급격히 하달됐고, 결국 8월 중순에 독일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봉기군을 제대로 돕기 힘든 상황이 됐다. 무엇보다 독일군의 반격으로 전선이 수십 km가 밀려나 독일군에 맞선 방어에 급급한 상태에 몰리게 된 상태였다. 소련이 1945년 1월이 되어서야 바르샤바를 해방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따라서 소련군 입장에서 보자면, 바르샤바 봉기 초반부에 군사적으로 공세 종말지점에 도달했을 뿐,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을 말살시키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소련이 봉기를 한 바르샤바 국내군을 지원하지 않았을까? 그것 또한 절대 아니었다. 소련은 9월부터 바르샤바 봉기군을 지원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공중 투하를 감행했다. 참고로 이 조치는 독일군에 대한 공세 개시와 더불어 이루어졌다. 9월 14일부터 10월 1일까지 제1 벨라루스 전선군은 바르샤바에 총 2,243회 출격하여, 박격포 156문, 대전차포 505문, 기관단총과 소총 2,667정, 탄약통 300만 개, 수류탄 4만 2,000발, 의약품 500kg, 식량 113톤을 투하했다. 그리고 이는 영국과 미국이 8월과 9월 동안 지원한 피스톨과 리볼버 1,344정, 자동 권총 3,855정, 경기관총 380정, 바주카포 237문, 박격포 13문, 소총 130정, 수류탄 1만 4,000발, 대전차 수류탄 3,000발, 플라스틱 폭약 8.5톤, 탄약 450만 발, 식량 45톤과는 비교가 됐다.
정리하자면, 현재 폴란드 정부가 주장하고 집단서방이 주장하는 바르샤바 봉기에 대한 반소 반스탈린 내러티브는 역사적 사실을 보았을 때, 현실과는 거리가 먼 얘기다. 소련군은 분명 최대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해방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독일군에 맞서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공격에 나섰다. 다만 바그라티온 작전 막바지에 무리하게 바르샤바 해방이라는 임무가 하달되어 공세종말지점에 도달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소련이 바르샤바 해방이라는 목적을 포기한 적은 없었으며, 영국이나 미국보다 좀 더 많은 양의 물자를 바르샤바 국내군을 위해 공중투하하기도 했다. 따라서 현재 폴란드 정부가 주장하는 바르샤바 봉기에 대한 내러티브는 명명백백히 역사왜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