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한 교회에서 목사로 성경을 가르치고 삶을 지도한다. 나는 언제부터 가르치기를 시작했을까? 내 기억에 초등학교 1학년 때가 가장 처음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우리 동네에 TV 도 그리 많지 않았고 TV 프로그램이 아침 5시부터 10시 정도까지 하고 낮동안은 쉬었다가 저녁 5시에 다시 시작했었다. 꼭 TV가 아니더라도 학교에 다녀온 아이들은 대부분 동네에서 자기들끼리 알아서 놀았다. 당시에 우리 집 앞 길 건너에는 큰 상수리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 뒤편으로 큰 마당이 있었고 그 마당 끝에 정월대보름에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 하나 있었다. 그 상수리나무 마당을 우리는 "큰 성황당"이라고 불렀는데 그곳이 동네 놀이터였다. 거기서 해가 지도록 노는 것이 우리들의 방과 후 활동이었다. 그렇게 놀다가 몇몇 집들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밥 먹으러 들어오라는 엄마들의 소리가 들리면 하나둘씩 성황당을 떠났다. 어머니께서 밖에서 일하셨던 나는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다가 집에 가곤 했다. 이 큰 성황당이 내가 내 수업을 한 첫 번째 교실이자 운동장이다. 나는 학교를 다녀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동생들을 모아 놓고 앉았다. 내가 여덟 살이었으니까 그 친구들은 예닐곱 혹은 대여섯 살이었을 것이다. 그 동생들이 누구였는지, 내 친구들도 있었는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모습은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나는 주로 그 동생들에게 했던 것은 이야기였다. 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하곤 했다. “내가 어젯밤에 꿈을 꿨는데….,” 아이들은 내 꿈 이야기 듣는 것을 좋아했다. 내 꿈 이야기는 주로 싸우는 내용이거나 코믹한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나는 어린 시절 모두가 경험한 것처럼 꾸던 꿈을 마저 꾸기 위해서 잠을 더 청하기도 하고 밤에 잠들 때면 꿈을 꾸고 싶어 했다. 당시에 꿈은 내 수업의 중요한 원천이었다. 때때로 나는 약간의 정보가 들어간 이야기를 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는 “서울에서는” 혹은 “내가 서울에 갔을 때”로 시작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서울을 가본 적이 없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누나가 이미 서울 쪽에서 일하고 있어서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당시 아이들 중에 나만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서울에 다녀온 적이 없으니 누구도 나한테 서울을 진짜 다녀왔냐고 묻지 않았다. 내가 유치원을 다닐 때 즈음에 우리 집이 잠깐 만화방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거기서 만화를 읽으며 한글을 뗐을 정도였는데, 아마도 그 만화를 읽은 것이 내가 "이야기 선생님"이 되는데 도움이 된 것 같다. 돌아보니 우리 어머니도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이면 이야기를 주도하셨던 것 같다.
두 번째로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으로서의 내 모습은 중학교 1학년 때다. 중학교 1학년이 되고 공주 시내로 통학을 했던 나는 토요일 오후에 초등학교 후배들을 데리고 수업을 했다. 장소는 우리 집 뒷마당이었다. 서너 명 정도가 함께 했던 기억이 난다. 수업은 주로 국어와 수학이었던 것 같다. 플라스틱 통을 뒤집어서 의자로 또는 책상으로 사용하면서 수업을 진행했다. 당시 내가 동네에서 공부 잘한다고 소문이 났던 터라 동네 엄마들은 아이들이 우리 집에 공부하러 가는 것을 좋아했다. 초등학생들 눈에 중학생이 얼마나 커 보였겠는가? 그 동생들은 내가 하라는 대로 뭐든지 따라 하려고 했다. 나는 앉아서 수업만 하지 않고 골목대장처럼 아이들을 데리고 뒷동산과 앞동산을 뛰어다니며 놀았다. 어설프지만 나무 위에 집을 지어 보자고도 하고 땅을 파서 굴도 만들어 보자고도 했다. 당시에 동네 집들 중에서 집 뒷산 쪽으로 작은 굴을 파 놓아서 김치나 곡식 저장고로 쓰기도 했는데 우리는 그런 동굴을 탐방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흥미진진한 수업은 용머리산을 시작으로 우리 동네를 감고 있는 낮은 산들 중턱에는 작은 성황당이 있었는데 그곳을 다녀오는 담력 수업이었다. “전설의 고향”이라는 드라마로 모두들 귀신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아무리 낮이라 해도 작은 성황당을 혼자 다녀오는 일은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곧 50대가 되는 나는 지금도 학생들을 데리고 인도를 여행한다. 아마도 그 원조는 중학교 1학년 때 동굴체험과 작은 성황당 투어인 것 같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나는 비로소 선생님이라는 호칭 들었다. 내가 처음으로 다닌 고향 교회인 수촌교회에서다. 중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교회를 다닌 나는 초등학생 때 주일학교를 다니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그래서 중학교 3학년 때, 중학생인데도 불구하고 초등학생들만 드리는 주일학교 예배에 참석했고 초등학교 6학년 성경공부에도 참석했다. 그렇게 1년을 공부하니 성경의 인물이나 사건들에 대한 기초 지식들이 생겼다. 그런데 당시에 나를 가르치셨던 대학생 선생님이 갑자기 군대에 가면서 주일학교 교사가 부족하게 된 것이다. 나는 1년 동안 그 공과공부를 했다는 이유로 교사로 추천이 되었고 드디어 선생님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에 주일학교 예배는 교사들이 돌아가면서 설교를 하곤 했는데 나는 그때 설교를 시작한 이래로 지금까지 설교를 하고 있다. 연수로만 따지면 30년 이상 설교를 한 것이다. 얼마 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들과 "등불"이라는 기독교 동아리를 만들었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 밤 11시에서 새벽 1시까지 학교 가까운 교회 기도실에서 찬양집회를 진행했다. 처음에는 아는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에게 설교 부탁을 했는데 너무 늦은 시간이라 점점 부탁하기가 어려워졌고 결국 고2였던 친구들끼리 돌아가면서 말씀을 나눴다. 이후 우리가 고3이 되어서는 내가 전담을 하게 되어 한 달에 한 번 백 명이 넘는 학생들 앞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나는 자습 감독을 하시는 선생님의 눈을 피해 가며 설교 준비를 하곤 했다. 나중에 신학 공부를 할 때 그때 전했던 메시지들을 떠올리며 낯부끄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설교자로서의 열정만큼은 그때가 지금보다 훨씬 뜨거웠던 것 같다.
이렇게 보니 가르치는 일이 내 은사인 것이 분명하다. 나는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고 즐거워한다. 내가 무엇인가를 알면 나는 그것을 가르치려고 한다. 때론 내가 가르치기 위해서 무엇을 알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때로는 영어이기도 하고 때로는 태권도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들 중에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내가 이것을 은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유전적인 영향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가진 은사를 하는 사람은 자존감이 높아서 결코 열등감에 빠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가진 은사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다른 사람에게서 그가 가진 은사를 발견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사람을 존경한다. 이런 사람은 결코 우월감에 빠지지 않는다. 나는 자녀 교육과 학교 교육에서 자녀와 학생의 은사를 발견하고 계발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각자가 자기의 은사를 발견하고 사용하며 산다면 모두가 즐겁고 유쾌한 사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자신의 은사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면 자신의 과거를 살펴보라. 거기서 “은사”라는 보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